[레이츄린]여정의 끝: 레츄가 나를이렇게 (2024)

*사망소재 주의

"이게 뭐죠?"

어벤츄린은 자신의 앞에 놓인 거대한 철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이중 삼중으로 봉인된 상자에 가까운 물건은 내용물을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시키고 있었다. 제이드는 들고있던 서류 한장을 어벤츄린에게 건네고는 바로 옆의 간이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직접 확인 하라는 뜻이었다. 익숙하게 어깨를 으쓱인 어벤츄린이 손에 들린 서류를 읽어내려갔다.

"우주정거장 헤르타에 반입 될 예정이었던 기물.. ...어? ..이거, 진짜에요?"

"지금까지 컴퍼니에서만 두 명이 죽었어. 아직 안 죽은 사람도 꼴이 말이 아니야."

어벤츄린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들어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조금은 난감하다는 듯이 팔을 으쓱였다. 서류에는 상자 속에 봉인 된 기물의 명칭과 그 힘,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기록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죽음을 예고하는 거울. 사용자가 사망하기까지 남은 시간과 사망원인을 표기함.]

[기물이 처음 발견된 행성에서 사용자 모두가 예고 된 날 예고된 원인으로 사망함.]

"그런데도 이걸 저한테 써보라는 이유는요?"

"윗분들이 이번에도 네가 살아남을지 궁금하시다는데, 어떡해? 나도 한번 막아봤어."

"그거 고마워해야하는거죠?"

"후후, 혹시 아니? 앞으로 80년은 더 산다고 나올지. ..네 행운이 이번에도 너를 구하길 바래, 애야."

"그래야죠. 저 아직 못 죽어요~"

제이드가 옅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유의 우아한 걸음걸이로 상자 앞에 선 그녀가 무언가 조작하자 요란한 굉음을 내며 상자를 구속하던 것들이 하나 둘 풀려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벤츄린이 손 안의 주사위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주사위가 땅에 부딪히고 굴러가는 소리는, 상자의 굉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주사위는 오늘도 선명한 스페이드를 선언했다.

상자가 열리고, 드러난 기물은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손거울이었다. 조금은 때가 묻은 금 장식에 오묘한 빛을 내며 허공에 떠있었다. 어벤츄린은 잠시 거울을 바라보다 이내 웃으며 허공에 뜬 거울을 오른손으로 잡아들어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삼중안은 거울 속에서도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거울의 표면이 일렁이며 숫자와 글씨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거울은 바닥을 나뒹굴어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베리타스 레이시오는 오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업무에 목욕시간도 줄어들었고, 오늘따라 기술 개발부의 신입 연구원들은 실수가 잦았다. 그 일을 처리하다보니 점심 때를 놓쳐 비상용으로 놓아두었던 에너지바로 끼니를 떼웠다. 그렇게 한참동안 연구원들을 붙잡고 씨름을 하니 시간은 어느덧 퇴근 시간이었다. 기술개발부 고문이라는 직위를 권유 받았을 때도 이정도 격무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컴퍼니는 이정도의 일을 레이시오에게 바라지 않았다. 이렇게 바빠진 것은 그저 레이시오가 우둔함을 고치려하며 눈앞의 일을 쉽게 넘겨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과했다. 머리에 열이 올라 석고상 안이 후덥지근했다. 우둔함을 가리기 위해 쓰던 석고상을 벗자 시원한 공기가 레이시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 레이시오가 머리칼을 정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연락이 없군."

바쁜와중에도 틈틈히 들여다 본 휴대폰 화면에는 여전히 어떤 연락도 떠있지 않았다. 매일매일 자신에게 귀찮을 정도로 연락을 하던 어느 도박꾼에게서, 오늘은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에게 연심을 품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 대상이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서툴다면 더 더욱 감추고 있어야했다. 어쩌면 이것이 레이시오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일 지도 모르겠다. 레이시오는 잠시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 위에 사과 하나가 떨어지고 나서야 휴대폰을 다시 들고 어벤츄린에게 문자 하나를 전송했다.

[오늘은 얌전히 있기로 한건가?]

생각해보면 레이시오 쪽에서 어벤츄린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늘 고민하고 망설이던 중 어벤츄린에게서 먼저 연락을 보내곤 했었던가? 스스로도 사교적이지 못하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사교적으로 보이려는 사람에게 진 기분이라 영 찝찝했다. 게다가 말을 잘못 꺼내면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치고나갈 것 같아 조심스러워지기만 했다.

1분, 2분, 5분...10분.. 레이시오가 논문 하나를 점검하고 커피를 내리고 목욕 준비를 끝마칠 때 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바쁜건가? 가뭄에 콩나듯 레이시오가 먼저 연락을 보내면 회의 중에도 답장을 칼같이 보내던 사람이 갑자기 연락 두절이 되니 마음 한켠이 찔리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생각을 이어가던 레이시오는 결국 벽에 머리를 박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오리가 띄워진 욕조에 몸을 담궜다. 하루의 피로가 모두 물을 따라 흘러가는 기분은 언제 느껴도 좋았다.

"...그러고보니, 내일 그녀석과 열계 탐사였던가?"

스텔라론의 영향을 받은 행성에 발생한 열계를 조사하기 위해 출장이 잡혀있었다. 이번에도 어벤츄린과 동행하게 되어 출발 전날까지 아주 소란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얼굴도 못보고 있으니 정말 무슨 일이 생긴건가 하는 잡념이 떠나가질 않았다. 레이시오는 한숨을 쉬며 물 속으로 스르륵 내려갔다. 보글거리는 기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어차피 내일 만날텐데, 그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베리타스 레이시오는 어벤츄린과 관련된 일이라면 범인에서 바보로 격하되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와 관련된 일이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충분히 비이성적이며 본능에 가까운 행동, 이게 사랑이라는 건가? 심리학 학위를 가졌어도, 자신의 일이 되면 결국 논제를 부정하고 해석하며 증명하는 것에 한계가 생긴다.

애초에, 자신 혼자서 증명할 수 없는 난제였다.

어벤츄린과는 첫 만남부터 좋지 못했다. 가히 최악이라고 평가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초면에 신뢰를 쌓기는 커녕 총을 잡게 하는 사람이 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다. 레이시오에게 그날은 거의 악몽에 가까운 기억이었다. 분명 그랬다. 행운과는 거리가 먼 불우한 사건의 연속, 그로 인한 자기파괴적인 행동과 극히 낮은 삶에 대한 의지. 그것들이 눈에 밟혔다. 어벤츄린은 자기 객관화가 나쁜 쪽으로 잘 되어있는 사람이었고 레이시오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박을 즐기고, 삶에 열정적이지 못하기에 돈을 물 쓰듯 쓰며 늘 이행되지 못할 유서를 품에 안고 다녔다. 꿈의 땅에서, 결국 레이시오는 정말 꿈처럼 그에 대한 사랑을 확인 했다. 그가 궁지에 몰리는 순간순간마다, 그를 쫓는 자신의 눈을 눈치챈 그 순간부터.

사랑이라는 난제는 그의 인생에 주어져있었다.

"뭐?"

"나 혼자 간다고. 애초에 교수 양반까지 갈 필요 없는 일이잖아?"

"열계 조사는 단순 업무가 아닐텐데? 애초에 이건 내 일이야. 왜 네가 하겠다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군."

"결과만 가져오면 되는 거잖아. 그것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

함선 승강장. 출발을 앞둔 함선 앞에서 어벤츄린이 레이시오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동행을 거부하고 자신 혼자 열계 조사를 마치고 오겠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레이시오는 하마터면 석고상을 쓸 뻔 했다.
전날 연락이 안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아니, 애초에 왜 이러는거지? 어벤츄린이 이유없이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레이시오는 머리를 굴리며 어벤츄린이 이런 행동을 할 이유를 찾았다. 물론 그의 머리에서 나올리가 없었다.

"명확한 이유를 대.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럴리가 없잖아."

"...그게.."

"답 할 수 없다면 네 제안은 거절 할 수 밖에 없군. 빨리 가지. 이미 3분 45초나 늦어졌어."

"잠깐, 이 와중에 그걸 세고 있었어? 아! 레이시오!!"

앞을 가로막아 봤자, 레이시오에 비해 어벤츄린은 작았다. 레이시오는 가볍게 어벤츄린의 팔을 붙잡고 함선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반항하는 힘은 너무 미약했다. 방금 전까지는 어떻게든 못가게 하겠다는 눈을 하고 있었으면서, 지금은 어딘가 서글픈 것 같이 보였다. 뭔가 숨기고 있군, 레이시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함선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서서히 함선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까지도 어벤츄린은 뚱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대놓고 나는 지금 심히 삐졌다, 라고 티를 내고 있었다. 레이시오는 읽으려던 책을 내려놓고 어벤츄린을 마주보며 팔짱을 꼈다.

"왜, 뭐. 화 안났거든?"

"난 것 같은데. 자신의 표정을 보는걸 추천하지."

"..이번에 진짜 위험할 수도 있어."

"언제는 안 그랬던가? 지난번 출장에서도 죽을 뻔 했던걸로 기억하는데."

"그건 계획이었잖아! ...이번엔, 느낌이 안좋아."

"직감에 의거한 것이라면, 난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것도 즐기는 편이라고 해두지."

아 이거 말 안통하네.

어벤츄린이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늘어지듯 기대었다. 자세를 고쳐 앉으라고 말하려던 레이시오가 말 없이 웃었다. 늘어져서는 입이 삐죽 튀어나와있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런 감상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교수양반, 정말 말 안듣는거 알지?"

"너에게 듣고싶지는 않군."

"윽.."

"스스로 자각은 있는 모양이군."

"그래도, 내가 걱정해서 말렸던건데!"

"나도 네 걱정을 했으니 동행을 선택한거라고 해두지."

"어?"

순간, 레이시오는 자신이 무슨 말을 뱉은 것인지 알지 못했다. 스스로도 놀랐기 때문이다. 맞은편에서 늘어져있던 어벤츄린이 놀라 자세를 고쳐앉는 동안에도 레이시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어벤츄린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나서야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었음을 인지하고 석고상을 썼다. 어벤츄린의 웃음소리가 들렸으나, 보이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틀린 말도 아니고, 사실이지 않던가? 혼자 보냈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짝사랑을 하는 쪽이 손해를 보는게 세상의 비이성적 진리였다.

"..음?"

"...하하하! 아~뭐, 어쩔 수 없지. 이미 와버린거. 돌아가서 밥이나 사, 교수양반."

"...그러지."

"어라, 왠일이래? 바로 수락을 다 하고?"

한숨을 쉬며 위를 올려다본 레이시오의 시야에, 본 적 없는 사람이 들어왔다. 어벤츄린의 뒤편, 2층 난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과 몸 전체를 가리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 충혈된 두 눈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발 아래, 구멍이 뚫린 함선 외벽과 쓰러진 컴퍼니 직원이 있었다. 침입자였다.

침입자는 들고 있던 폭탄을 손에 쥔 채 어벤츄린의 바로 위로 몸을 던졌다.

"...! 어벤츄린!!"

"어?"

순간, 세상이 번쩍였다.

들리는 것은 삐-하는 이명 뿐이었고, 몸은 바닥을 굴러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캐한 연기가 함선 내무를 가득 채웠다가, 뚫린 구멍으로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거센 바람과 충격으로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레이시오."

어벤츄린은 상체를 일으켜 앞에 쓰러진 사람에게 양 팔을 움직이며 기어갔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쉴드를 펼쳤으나 이미 사정거리 안이었다. 팔 하나를 못 쓰게 되더라도 폭탄을 쉴드 범위 밖으로 던지려던 찰나,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의 뒷덜미를 잡고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펑.

폭발에 휘말린 레이시오와 어벤츄린이 한참을 나뒹굴었다. 침입자는 이미 폭탄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폭발에 놀란 직원들이 로비로 뛰어오고 있었다. 주변에는 폭발에 휘말려 신음하는 직원들과 그런 그들을 챙기는 직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어벤츄린에게 보이는 사람은 단 한사람 뿐이었다.

"레,이시오... 정신 차려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충격으로 감각이 없는 두 다리 대신 두 팔로 기어가 도달한 곳에는 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자, 어벤츄린이 레이시오의 턱을 살짝 들고 입을 맞추었다. 숨을 불어넣는 와중에도 맥을 확인 하기를 반복했다. 몇번 인공호흡을 반복하자 레이시오가 피 섞인 기침을 하며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했다. 쉴드마저 없었다면, 정말로 죽었을 지도 몰랐다.

"..왜, 네가..."

오늘 죽을 사람은 나였는데.

어벤츄린이 떨리는 손으로 레이시오의 뺨을 쓸었다. 먼지와 연기로 눈이 아팠다. 그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저 멀리 달려오는 의료팀을 바라보던 어벤츄린이 몽롱해지는 의식을 부여잡지 못하고 레이시오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10시간 전, 거울을 통해 본 그 숫자와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시스템 시간 10시간, 폭사]

출장은 당연하게도 다른 팀에 인계되었고, 함선은 머리를 돌려 피어포인트로 돌아왔다.
범인은 외부에서 침입한 컴퍼니 적대 세력으로 추정되었으나, 시신이 폭발로 산산조각나버려 정확한 신분이나 소속을 확인 할 길이 없었다. 남은 핏자국이나 옷가지로 알아낼 수는 있겠으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불이 모두 꺼진 채, 작은 탁상용 전등 하나만 켜져있는 병실.
어벤츄린은 이마와 오른손, 왼 발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으나 앞에 누워있는 사람에 비해서는 경상이었다.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아, 눈을 뜬 채 허리를 숙여 양 손을 맞잡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어벤츄린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1인 병실에는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레이시오가 누워있었다. 머리와 어깨, 팔, 다리. 붕대가 감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의사의 말로는 거기서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레이시오의 옆, 간이의자에 앉아있던 어벤츄린이 느릿하게 레이시오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몇 시간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 두 눈은 피로감이 쌓이고 있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양 손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그때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을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어벤츄린은 고개를 숙여 떨리는 손에 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은 새로운 숫자와 단어를 제시하고 있었으나, 어벤츄린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시스템 시간 108일, 사랑]

어떤 방식이든, 자신은 결국 사랑으로 인해 죽는다는 의미인가? 직관적인 단어에서 갑자기 감성적인 단어가 나오니 머리가 오히려 복잡해 지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이 거울이 가져온 결과들을 모두 본 어벤츄린은 이 글자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이 정해지는 순간 무기력해진다던가. 불확실하던 미래가 갑작스레 확정되고, 그 시간이 유한해지는 순간. 인간은 발버둥치거나, 순종하여 죽음을 기다리는 비참한 삶을 살게된다.

굳이 따지자면, 어벤츄린은 발버둥치는 쪽이었다. 살아가라는 말을 들은 이상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건 네가 있어야 성립되는거였어."

제이드를 처음 만난 그날 들었던 말은 여전히 어벤츄린을 옭아 매고 있었다.

[이 우주에 네가 눈감기를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이 우주의 그 누구도 자신이 살아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금석이 아니라 '어벤츄린' 혹은 '카카바샤'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을 원하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체 얼마나 많은 과오를 저질렀길래 이 세상에 태어난걸까. 오랜 시간 스스로 되물어 왔던 원초적인 질문이 다시금 수면 위로 올랐다.

"나에게, 태어난 이유 같은게 있을까."

이유가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평가였다. 아마, 레이시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맞는 말이었다. 어벤츄린은 이유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했으니까. 자신이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해서 컴퍼니가 얻는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남은 108일 동안, 컴퍼니는 어벤츄린이라는 보석이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수익을 얻으려 할 것이다. 죽은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묻힐 곳은 없으니 화장해서 우주에 뿌려줄까? 뿌린다면 츠가냐가 좋을 것 같은데.

이루어지지 못할 생각이 이어졌다.
머리를 비우려는 듯이 눈을 감은 어벤츄린이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태어난 이유는 몰랐고, 살아갈 이유는 지금 네 눈앞에 중상을 입고 누워있었으며 죽을 이유는...

"..너무 많은데."

세상은 그를 반기지 않았고, 돌아갈 곳도 없었다. 컴퍼니를 나온 순간, 그는 그 무엇도 아니게 될 터였다. 우주 난민, 노예, 사형수. 그 무엇도 살아갈 이유가 되지 못할 것들이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필사적으로 회전판을 돌리며, 목숨을 걸며 살아남아왔는데. 문득 자신이 진심으로 삶을 원했던 시간은 레이시오를 만난 반년 남짓한 시간 뿐이었다. 어벤츄린은 제 외투 안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페나코니에서, 레이시오가 그에게 건냈던 병이었다. 너무 읽어, 끝이 너덜거리는 작은 종이를 펼쳐보았다. 잠을 이루지 못한 밤, 끝도 없는 슬픔에 잠겨가던 날. 그런 날마다 읽고 또 읽었던 문장이 두 눈에 담겼다.

[살아가세요. 행운을 빕니다.]

더 이상 지킬 수 없어진 충고였다.

"...계속 내 곁에 있으면, 네가 위험해지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어벤츄린이 조심스럽게 레이시오의 눈가에 손을 올렸다. 얕게 들리는 숨소리를 듣던 어벤츄린이 살며시 허리를 숙여, 눈가에 포갠 제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떨어졌다.

언제나 그랬다. 자신을 도운 사람은 모두 사라졌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큰 행운은, 큰 불행을 가져오는 법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나는 너의 곁에 있으면, 그것만으로 행복하지. 하지만 내가 있으면 너는 다치고 불행을 겪게 될 거야. 너의 불행은, 나의 탓일테다.

그렇다면, 내가 없어야 네가 행복할 수 있을테지.

조용히 병실을 나선 어벤츄린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뜬 그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며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으로 걸어보는 전화였기에, 몇번이고 전달받은 번호를 살핀 후에야 연결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저에요."

[그래. 결정했나?]

"...네. ...죄송해요."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그동안 컴퍼니를 위해 열심히 일해줬는데. 물론.. 제이드가 손을 쓴다고 해도 네 재산 절반은 반납해야 하겠지만..]

"상관 없어요. 어차피 108일 정도밖에 안 남았잖아요. ..와... 이렇게 알고나니 정말 미쳐버릴것 같네요."

[다들 그래서 스스로 뛰어내리기도 했다지. 너는 그러지 않아서 기특하네.]

"그래요? 그럼, 기특한 김에 레이시오한테 잘 좀 말해주세요."

[제이드가 처리할거다. ..너는 괜찮나? 그가 너를 찾을텐데.]

"얼마 안가 포기할거에요. 오히려 제가 없어서 편하다고 생각할 걸요? 걔, 저 안 좋아하잖아요."

스피커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언제 들어도, 정말 숨이 막히는 웃음소리였다.

[뒷일은 생각하지마. 스톤하트는 공석이어도 상관 없으니까. 너는 다른 일만 처리하면 된다.]

"..네.."

전화가 끊어진 후, 어벤츄린은 문득 자리에 멈추어섰다. 창 밖으로 드넓은 우주가 펼쳐져있었다. 수 많은 별이 빛나고 은하는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새삼 깨닫고 말았다.

이 넓은 우주에, 내가 죽을 곳은 없다는 것을.
죽음은 아름답다고 찬미 될 것이 아니며, 이 우주 어디에도 죽기 위해 태어난 생명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준비되지 못한 이별은, 결국 눈물이 되어 정처 없이 떠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어벤츄린은, 자신의 죽음이 적어도 추악하지만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문득, 사랑이 자신을 죽인다면 그를 죽일 사랑은 누구일까 생각해보았다.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그것이 누구에게서 오는 사랑인지 알 수 없는 시점에서, 이 죽음은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나를 죽인다면, 너였으면 좋겠는데."

아직 눈을 감고, 잠에 빠져있을 사람을 떠올린다. 언제였더라, 우울이 몸을 감쌌던 때가 있었다.
그날, 레이시오가 자신의 목을 감싸쥐는 꿈을 꿨던 것 같다. 숨이 막혀오는데도, 이대로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는 그걸 바라기도 했던가?

"...네게 그런걸 시키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포기했다. 그 두 손을 자신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어벤츄린은 멈추었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적막한 복도에는 곧 사라질 구두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림자는 서서히 흩어졌고 우주는 여전히 적막만을 남겼다.

내가 사랑으로 죽는다면,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

나를 죽여주기를 바라며.

레이시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건으로 부터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컴퍼니의 의료기술은 뛰어났기에 레이시오는 어느정도 거동이 가능 할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후유증도 없었고 흉터도 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레이시오는 의식을 되찾고 얼마 뒤, 링거 줄을 모두 뽑아내고는 복도를 달려갔다. 거칠게 뽑아낸 탓에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지금 레이시오의 신경은 모두 한곳에 쏠리고 있었다.

"어벤츄린."

열려있는 어벤츄린의 개인 사무실. 난잡하게 널려있는 서류들 사이, 바닥에 주저 앉아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무언가를 정리 하고 있는 어벤츄린이 있었다. 목소리에 고개를 든 어벤츄린이 문 앞에 서있는 레이시오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평소와 같이 미소를 지었다. 피로감에 두 눈은 충혈되었고 눈 밑은 검었다.

"...레이시오. 좋은 아침. 몸은.. 잠깐, 너 손에서 피 나잖아! 뭘 한거야?!"

"너는.. ...무사하군."

"그래! 어딘가의 미련한 교수 양반이, 폭발 앞에서 무려 보존의 길을 걷는 사람을 감싸주시는 덕에 경상이었어! 그래, 오늘 너 잘 만났다! 여기 꿇어 앉.."

어벤츄린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느틈엔가 자신의 앞에 선 레이시오가,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덩치가 무슨 냉장고 문짝만한 남자가 순식간에 제 앞에 서자, 어벤츄린은 당연하게도 주춤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시오는 아무 말도 없이 피가 흐르지 않는 다른 손으로 어벤츄린의 이마를 쓸었다. 파편이 튀며 상처가 난 탓에 거즈를 덧대어 붙여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벤츄린은 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던 인간이 이걸 걱정하는건가? 라는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교수양반, 눈빛으로 사람 죽일 거야?"

지금 눈앞의 얼굴이 너무 무서웠다.
무슨,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는 듯이 상처 위를 쓸던 레이시오가 한숨을 내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제가 생각해도 가깝다고 느꼈는지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졌다. 헉, 하는 소리를 낸 어벤츄린이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왁왁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 아무튼!! 너 무슨 생각이었던거야?! 구해주려 한건 고맙지만 그걸 왜 감싸! 너 수렵이잖아!!"

"그 상황에서 이성이 본능보다 앞설 수는 없지. 생존본능이야."

"그런게 나를 감싸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죽으려고 작정했어!?"

"당연히 아니지. 그 증거로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지."

"그런 말이 아니잖아!"

어벤츄린이 제 화를 못 이겨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도 그 상황을 떠올리면 손이 떨렸다.

"나는."

레이시오가 말 없이 제 손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그 상황에서 너 밖에 안 보였어."

"...그런 말 한다고 용서 안 해줄거야. 어디서 그런걸 배웠어. 진리 대학에선 사과할 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나?"

"...크흠...일단은 미안하다."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야. 하~ 기분이다! 용서해 줄게. 이렇게 좋은 친구를 둔 자신을 칭찬하라고, 레이시오."

싸워봤자 의미가 없었다. 일어난 일을 어떻게 수습하는가.
두 사람은 지금 살아있었기에. 지난 실수나 선택을 다시 선택 할 수도 없었다. 레이시오는 어깨를 으쓱이다가 어벤츄린이 제 손을 잡고 이끄는 것에 순순히 따라갔다.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달려온 터라, 반항할 힘을 낼 의지조차 없었다. 어벤츄린은 무어라 중얼중얼 하며 서랍 안쪽의 상자를 꺼냈다. 언젠가, 레이시오가 화를 내며 건네 준 응급치료키트였다. 몇번 사용 한 것인지 반창고나 붕대가 눈에 띄게 줄어있었고, 연고와 알코올 솜도 절반이 줄어 있었다.

"다쳤었나?"

"조금? 그때 다쳤을 때도 썼고... 몇 번 더 쓰긴 했지?"

"왜 말을 안했지? 네 담당 의사는 나야."

"그리 큰 상처도 아닌데 뭐. 자잘한건 내 선에서 끝낼 수 있어."

"다음부턴 말 해."

"하지만.."

"대답."

"...네~네~ 알겠습니다~"

처치를 끝낸 듯, 어벤츄린이 양손을 펼쳐 보였다. 피는 멎었고, 붕대는 제법 깔끔하게 감겨 있었다.
손을 살피던 레이시오가 시선을 옮겨 엉망진창인 사무실을 한번 살폈다. 평소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활감이 없던 곳이, 오늘은 서류며 온갖 잡동사니로 난장판이었기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여기는 왜 이모양이지?"

"아~정리 중. 일이 너무 많아서."

"지난 사고때문인가?"

"그런 것도 있고. 나 원래 바빠, 레이시오. 이만 병실로 돌아가 줄래? 너 아직 환자에요 의사양반."

"..도와줄 일은 없나?"

"내 말을 뭘로 들은거야? 지금 네가 해줄 일은 병실로 돌아가서 진료를 받는거야."

아오! 짜증 섞인 소리를 지른 어벤츄린이 레이시오의 등을 떠밀었다. 꼬박 일주일을 의식없이 누워있던 환자가 뛰기 까지 했으니, 레이시오는 걷는 것도 불안정했기에 수행원에게 책임지고 모시라고 언질을 주고 나서야 어벤츄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벤츄린."

"왜 또~ 난 멀쩡하다구요~~"

"나중에 식사나 하지."

"....응. 그러자."

대답을 들은 레이시오가 옅게 미소짓고는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옯겼다. 그가 복도 끝에서 사라질 동안, 어벤츄린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 또 하나 늘었다.

"뭐?"

"퇴사했어요. 오늘 짐 다 빼고... 못 들으셨어요? 아침에 뛰어가셨다고 들었는데.."

어벤츄린이 스타피스 컴퍼니를 그만 두었다는 말을 들은 것은, 그날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퇴원 수속을 밟은 직후, 어벤츄린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으나 존재하지 않는 단말이라는 메세지가 떴다. 그와 인연이 있는 개척자에게도 물었으나 그 또한 연락이 되지 않는 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무실은 모든 짐이 빠져있었고, 명패도 사라져 있었다. 겨우 토파즈를 만나 이야기를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이거였다.

"...갑자기 왜?"

"저도 이야기는 못들었어요. 제이드씨도 말을 안 해주시고.. 다이아몬드님은 만나지도 못했어요."

"...고맙군. 수고해."

"네.. 몸 조심하세요.."

빠른 걸음으로, 거의 뛰어가다시피 복도를 지나는 레이시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토파즈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레이시오한테는 비밀로 해줘. 너한테도 미안하네. 인수인계 힘들텐데.]

"끝까지 남 걱정만 하던 인간이 무슨.. 살아 돌아와서 휴가 동안 못 한 일이나 하라지."

토파즈는 이번에도 그의 행운이 그를 살리기를 바라고 말았다.

레이시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디로 간거지? 어떻게? 수 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채웠다가 사라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왔다.

왜?

원초적인 질문 만이 남았다.
아침에 사무실을 정리 하던 것이, 일을 그만두기 때문이었나? 어디로 간거지? 도대체 왜 갑자기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나. 수많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와중, 빠르게 걷던 레이시오가 멈춰섰다.

제이드 라는 명패가 붙은 문 앞에 선 레이시오가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똑똑, 노크를 두번 했다.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리자 곧장 거칠게 문을 열고 안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제이드는 조금 놀란 듯 하더니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닥터 레이시오. 몸은 괜찮으신가요?"

"...인사치례는 그쯤하지. 내가 왜 왔는지 당신은 알고 있지 않나?"

"안타깝게도 저는 아무 말도 해드릴 수 없어요. 그 애가 원했거든요."

"...무슨 뜻이지?"

"어벤츄린은 이미 피어포인트를 떠났어요. 사직계는 승낙되었고, 노예 신분을 완전히 지우는 대가로 재산 절반을 컴퍼니에 귀속 시킨 후 하루만에 모든 절차를 끝냈죠. 행선지는 저에게도 말 하지 않았으니 그 꼬마아이가 어디 있는지는 컴퍼니도 모르고 알 생각도 없죠."

"고작 그걸로?"

"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제이드가 웃음지었다. 거대한 뱀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이시오는 문을 닫고, 팔짱을 꼈다. 제대로 말 하지 않으면, 절대 나가지 않을 기세였다.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얕게 한숨을 쉬며 웃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던가? 어쩜 고집부리는 것도 이렇게 똑같은지. 닮은 사람이라 사랑한건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이드는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지긋이 레이시오를 바라보았다.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갑자기 퇴사한 이유라도 들어야겠는데."

"교수님. 당신께서는 어벤츄린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왜 그런걸 묻지?"

"그야, 폭발에 휘말려 생사를 오간 사람이 깨어나자마자 찾는게 제 부하직원이라는데. 궁금해질 수 밖에요."

"내가 그 녀석을 사랑하니까."

"어머나?"

제이드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레이시오는 이미 그녀가 자신을 꿰뚫어보고 있음을 알았기에, 거리낌없이 말했다. 당장 내숭을 떨고 숨기는 것 보다는, 어벤츄리는 찾는 것이 더 급했다. 물론, 다시 생각하니 너무 비이성적인 발언이었으므로 두어번 헛기침을 하고는 석고상을 썼다가 다시 벗었다.

"꽤 직설적이시네요? 고백도 안하시길래 접은 줄 알았어요."

"언제부터 알았지? 불쾌하군."

"적어도, 전략투자부에서 못 알아챈건 그 애 뿐일걸요? 토파즈도 진저리를 쳤는데. 정말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셨나봐요?"

사실,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에게 기묘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은 최근 피어포인트 대화 주제 중 하나였다. 대부분 그들과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심심하면 꺼내는 대화 주제 정도였지만, 그래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베리타스 레이시오가, 그 어벤츄린을?

이거 정말 재미있다. 제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 그 대화 주제를 한번 들었던 어벤츄린이 기겁을 하며

'무슨 소리에요? 레이시오가 저를 왜 좋아해요?! 당장 방금도 꼰대같이 옷차림 지적 받고 왔어요!!'

라고 말하며 씩씩 화를 냈던 것을 기억하면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 지적이 그날 다소 살갖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있었기에 한 지적이라는 걸 그 아이는 알까? 사소한 호의와 사소한 걱정.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레이시오의 이상행동은 모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애정, 사랑... 뭐 그런 것들. 물론 제이드는 남의 사랑에 참견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삽질 하는 걸 관람하는 것도 제법 심심풀이로 좋았지만, 남은 시간은 앞으로 101일 이었다.

많은 사람이 믿지 않겠으나, 제이드는 어벤츄린에게 비교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약속했거든요. 하지만..."

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제 책상 서랍에서 카드키 하나를 꺼내어 레이시오에게 건넸다. 검은 바탕에, 금박으로 컴퍼니 로고가 새겨진 출입카드였다.

"이게 어디에서 쓰이는지 알아내신다면, 그때는 저도 어찌 할 도리가 없죠. 안그런가요?"

"...고맙군."

"별말씀을요. 때로는 솔직한 것도 승리의 열쇠랍니다, 박학다식한 교수님."

레이시오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방을 나섰다. 제이드는 그 자리에 서서 그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어벤츄린의 위치를 찾는 것은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걸려봐야 일주일 정도겠지.

"잘 이야기해야할텐데~"

어벤츄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는 어벤츄린을 두 팔다리 붙여 컴퍼니를 무사히 나가게 한 것으로 이미 할 일을 다 했다.

"남은건, 두 사람이 결정지어야지."

후후후, 낮은 웃음 소리가 적막한 방을 가득 채웠다.

레이시오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걸터 앉았다. 손에 들린 카드키를 지긋이 살피다, 이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드키에 부여된 고유번호를 알아내면 어느 구역에서 사용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카드키에 로고가 있는 것을 보아, 피어포인트 내에서 사용되는 보안 출입 카드였다. 일반 구역에서는 사원증을 사용하니, 보안 카드로 출입하는 곳일 것이며, 그 곳을 위주로 찾아가면 되겠지.

"...하아..."

머리가 순식간에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그간의 피로가 몰려오는 것 처럼 어지러워, 레이시고는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일주일간 병상에 누워있던 탓에 업무가 밀려있었다. 그걸 처리하면서 사람까지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물 중에 몸을 두개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던 듯 한데, 그거라도 써볼까..? 바보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가 이내 사라졌다. 당장 그런걸 시험해 볼 만큼 여유롭지는 못했다.

"....음?"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눈을 뜨고, 책상에 당겨 앉은 레이시오의 눈에 서류 하나가 들어왔다.

[죽음을 예고하는 거울]

최근 피어포인트에 반입된 기물에 대한 보고서였다. 기술개발부에 분석이 의뢰되었던 것 인가? 붉은 도장에 여러개 찍혀 있는 것을 보아 상당한 위험등급을 가진 기물로 보였다. 첨부된 사진은 거울의 앞면이 아닌 뒷면이었고, 아래에는 기물을 사용한 사람의 명단과 그 결과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기술개발부 P17 필립. 사용 당시 시스템시간 5년 6개월, 심장마비. 그는 고령이며, 심장 관련 지병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가능성은 충분함.]

[전략투자부 P20 아이린. 사용 당시 시스템시간 2일, 교통사고. 실제로 2일 후 외근 중 10중 추돌 교통사고로 즉사하였음]

컴퍼니 직원 이외에도 기물이 처음 발견된 행성에서 수백건에 달하는 죽음과 예고가 나타났으며 기물이 죽음을 정하는 것인지, 다가올 죽음을 예고하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여 정밀 분석을 요청한 상황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죽음이 확정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삶에 대한 의지가 옅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분석이 중지되고 기물은 봉인 후 우주정거장 헤르타에 다시 인계 될 예정이었다. 레이시오는 이미 처리된 일이기에, 서류를 대충 던져두었다. 하지만, 바로 다시 들었다. 있어서는 안될 이름이 적혀있었다.

[전략투자부 P45 어벤츄린. 사용 당시 시스템시간 10시간, 폭사]

서류가 작성 된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그 날인가."

어벤츄린은 그 날 죽을 운명 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운이 또 한번 그를 살렸다. 그 대신, 곁에 있던 자신이 죽음의 기로에 놓였다. 어벤츄린에게서,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지모신의 축복. 에이언즈 체재에 들어있지 않는 민속신앙, 그 존재조차 미지수이며 이제는 증명 될 수 없는 츠가냐의 신. 지금의 연결된 은하에서 민속 신앙은 퇴색되며 그 의미를 잃은지 오래였으나, 때때로 어벤츄린은 지모신께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의 비정상적인 행운도, 그 신에게서 오는 것일까.

레이시오는 불확실한 것을 생각보다는 현실을 보기로 했다. 정말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는 것인지, 어벤츄린은 이 넓은 피어포인트에서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웠다. 지운다는 표현도 다소 이상했다.

그는 이곳에 많은 흔적을 남긴 적이 없었으니까.
카드키를 손에 든 채, 레이시오가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적막 속에서, 희미한 자판 소리만이 생명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꿈을 꿨다.

보고싶은 사람들, 그리운 풍경, 따스한 미소.

그런 것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카카바샤]

거대한 손이 자신을 감싸쥐는 듯 끌어안았다. 따스하고, 차가웠으며, 무겁고도, 안락했다.

언젠가.. 또 다시 비가 내리고..

하늘에서 지모신의 부름이 들려온다면....

[부름에 응답해야해.]

아, 이것이 나의 운명이구나.

언제나 그러하듯이, 마지막까지 불공평하구나.

피어포인트 최하층, 과거에 감옥으로 쓰였던 방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멋드러진 객실로 치장 되어있었다. 간혹 새어나가서는 안될 사안을 논의할 때 쓰는 객실은 수많은 보안 절차를 지나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객실 안에서.

"으아아악 끝났다!!!"

어벤츄린은 초췌한 얼굴로 노트북을 부서질 듯이 덮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이미 피어포인트를 떠났다고 알고 있으나, 사실은 달랐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했다. 하루만에 모든 인수인계를 끝내고 업무 내용을 정리해 보고할 수 없을 만큼, 어벤츄린은 컴퍼니에서 제법 중요한 인물이었다. 본인이 사형수건 노예 출신이건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다. 곧 죽을 사람이라도 일은 모두 끝마쳐야만 했다. 인생의 서글픔을 느끼며, 어벤츄린이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몸을 날렸다.
품이 큰 옷은 어깨의 반절을 드러내놓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곳에는 누구도 오지 않을 것이며, 자신 또한 누구도 만날 생각이 없었다.

이곳을 내어 준 것도 제이드의 배려였다.
떠나는 날은 내일이었으나, 그 전에 레이시오를 또 마주치게 된다면 미련만 남을 것 같았다. 만약 죽지 않는다면, 어림잡아 100일 뒤에 욕을 한 바가지로 얻어 먹는 편이 나았다. 당장 얼굴을 보고 이별을 말 할 용기가 없었다. 객실에는 바로 밖으로 이어지는 간이 승강장이 있었기에 다음 날 떠날 때도 제이드가 정해준 시간에 개인 우주선을 타고 어디로든 떠나면 될 터였다.

그래도 내가 일을 열심히 잘 했나봐, 제이드씨가 이런 배려를 다 해주고. 어벤츄린이 상체를 일으켜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특수 처리가 되어있어, 바깥에서 본다면 검은 벽으로 보일 것이기에 어벤츄린은 창가에 등을 기대어 앉아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반절은 창 밖의 우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아무 말도 못했네."

고백을 준비하던 시기가 그에게도 있었다. 언제였더라, 페나코니에서 돌아온 이후였던가?
첫 눈에 반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레이시오는 잘생겼는걸. 어깨도 넓고, 팔뚝도 끝내주고, 손도 크고 핏줄이 보일 정도로 단단했다. 다리도 어찌나 긴지, 전체적으로 비율이 좋았으니 금상첨화였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도, 그 시선도, 석고상을 거의 쓰지 않던 그 인정과 배려도. 모두 어벤츄린을 홀리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괜히 나쁜 경험을 줄 수는 없지."

자신에게 고백했던 사람이 100일 뒤에 죽었다,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면. 레이시오는 분명 신경 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우둔함을 경멸하면서, 정이 많았다. 지식이 목적이 아닌 수단인 이유도 결국 그 정이 문제였다. 레이시오는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 더 많은 지식을 탐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 길을, 자신이라는 걸림돌이 막을 자격은 없었다.

죽음을 인정했나? 아니, 그는 살고 싶었다.

"...너무하시기도 하지."

진심으로 삶을 추구하기로 다짐한 순간은, 그에게 주어진 시간보다 너무나 늦었다.
자비와 관용은 충분히 베풀어졌고, 그는 아직 살아갈 이유를 얻지 못했기에. 애초에 고백 할 생각도 진작에 접었으니 상관 없으려나.. 내가 사라진다고 해서 레이시오가 오랜 시간 자신을 찾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눈앞의 고뇌와 절망을 보고 눈을 돌리지 못하며, 스스로 해결하라고 타박을 주면서도 인간이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모든 판을 짜둔다. 누가 도박꾼이라는거야? 인간을 믿는다는 행위 만큼 거대한 도박도 없을텐데. 어벤츄린은 헛웃음을 지으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가 만들어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기에, 꿈 속에서 나타나기를 바라며.

쾅쾅쾅!!

"으악, 뭐야!?"

두드려질 일이 결코 없을 문이 거센 소리를 내며 조금 흔들렸다. 여길 누가 온다고?! 온다고 해도 자신의 위치를 아는 제이드나 토파즈, 다이아몬드. 세명 중 한명이거나 그 수행원일 것이었지만.. 그 후보군 중 이런 식으로 문을 두드릴 사람은 없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에 어벤츄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거세게 두드릴 때는 언제고,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금세 조용해졌다.

어벤츄린이 문에 보안장치를 하나 걸고 조심 스레 열었다.

"어."

"..."

문 틈으로 보이는 복도, 그곳에 레이시오가 서있었다. 한참 뜀박질이라도 한 것인지 잘생긴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있었고 땀을 흘려 머리칼이 이마와 뺨에 달라붙어있었다. 와, 땀흘리는 남자는 섹시하다던데. 이걸 이렇게 증명하네 이 양반. 쇄골에 땀방울 맺힌거야? 이야... 대충 이런 생각을 하던 어벤츄린이 현실을 도피하듯 방긋 웃으며,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레이시오가 문을 잡았기에 미수에 그쳤다.

"열어"

"...으악, 무슨 힘이 이렇게 세!! 교,교수야 우리 말로 하자 말로..."

"먼저 도망친건 너야. 열어. 세번은 없어. 얼굴은 또 왜 그 모양이지?"

"으으...이 와중에 얼굴은 왜 살펴..."

정말 열지 않으면 다음 순간에는 분필이 문을 두동강 낼 것 같았고, 손으로 문을 잡고 있어 잘못하면 다칠 것 같았다. 결국 어벤츄린은 문을 열고 두어걸음 뒷걸음질 쳤다. 당장이라도 그를 잡아 챌 것 같던 레이시오는 조용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와 문을 닫고는, 이중으로 잠궜다. 무서워, 왜그래. 꼼짝없이 진짜 감옥에 갇힌 처지가 된 어벤츄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방음도 완벽하고, 오는 사람도 쟤 하나 빼고는 없는 이곳에서 도움요청 따위를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니 잠깐만.. 애초에 이 양반은 어떻게 여길 알고 온거야??

궁금증이 커지던 그때, 레이시오가 낯익은 검은색 카드키를 꺼내어 어벤츄린에게 건네었다. 만약을 대비해 제이드가 챙겨둔 보안구역의 스페어키였다.

'제이드!!!!!'

믿었는데!! 믿었는데!!! 기어코 레이시오한테 이걸 넘겨줬다니! 레이시오 정도 되는 머리와 능력이면 이게 어디에서 사용되는 카드키인지 정도는 시간만 들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그래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어벤츄린은 다가오는 레이시오에 따라 뒷걸음질 치다가 침대에 발이 걸렸다.

"으악..!"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려는 찰나,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의 손과 허리를 잡았다. 어차피 뒤는 침대이니 그대로 넘어지게 두어도 괜찮았을텐데. 어벤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시오를 올려다보자, 그는 조심스럽게 어벤츄린을 침대에 앉히고 자신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오늘따라 그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붉어보였기에, 어벤츄린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더욱 아래로 내려 바닥만을 응시했다. 지은 죄가 아주 없지는 않았기에 무서운 마음도 한 몫했다.

"그, 교수양반.."

"왜 말도 없이 컴퍼니를 그만두고, 이런곳에 있었지?"

"어.. 그게 있지. 이제 좀 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여기 있었던 건 인수인계가 덜 끝났고.."

"제이드는 네가 하루만에 인수인계를 끝내고 이미 피어포인트를 떠났다고 친절하게도 네 편을 들어주던데."

"....이제 안 볼텐데, 괜히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것 보다는.."

"인간관계는 조직을 벗어난다고 해서 끊어지는게 아니야, 도박꾼."

아, 무슨 말을 해도 이길 수 없다.

애초에 어벤츄린에게 불리한 판이었다. 판을 준비한 어벤츄린 본인만이 몰랐을 뿐이다. 어벤츄린은 레이시오를 버릴 수 없고,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을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정말 쉬고 싶었던거야. 알잖아.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친거. 이젠 지쳤어."

"내 처방은 쓰레기통에 처박은 모양이군."

"...레이시오.."

"난 환자를 죽게 둘 생각이 없어. 가망이 없는 환자여도 최후의 최후까지 내 소임을 다 할거다."

잊은 것 같은데, 난 의사다. 망할 도박꾼.

아마, 어벤츄린이 피어포인트를 떠났더라도. 레이시오는 끝내 그를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의사는 환자를 버리지 않고, 그 생명의 끈을 끝까지 쥐게 할 테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난 가망이 전혀 없는 환자 중에서도 최악이야, 의사 선생."

"그래. 100일 정도 남았나? 그 동안 해볼 것들은 많지."

"...잠깐만, 뭐라고?"

"기물에 대한 분석 요청이 기술 개발부에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마이너스 5점이다."

"..봤구나."

당연한 인과결과였다.

어벤츄린은 레이시오가 병상에 누워있었기에, 그 거울에 대한 정보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거기서부터 이 판은 어벤츄린의 패배였다.

"어벤츄린. 대답해."

하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패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적어도.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

너에게 나의 끝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벤츄린은 말 없이 고개를 들었다. 거대하고 따스한, 어떤 손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눈들은 레이시오의 것이 아니었다.

"...진짜 죽음이 다가오면, 사람은 때를 알게 된다고 하잖아."

"불확실한 가설이지."

"그렇다면, 내가 네 앞에서 가설을 증명하게 되는 최초의 사례가 되겠군."

떨리는 양 손을 붙잡고, 어벤츄린은 그저 미소지었다.

"레이시오, 곧 지모신께서 나를 부르실거야. 나는... 그 부름에 응답해야만 해. 나의 부모님과 누나가 그러했듯이."

"...확신하고 있군.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그렇기에 불확실해. 네가 정말 죽을거라 생각하나?"

"느낌이야. 내 느낌은 대체로 맞았고. ...그래서 너에게 말하지 않았어. 자기 환자가 곧 죽을거라고 하면.."

"내가 포기하지 않고 붙잡을테니까."

어벤츄린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을 몰랐다. 아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정확히는, 제 눈앞의 '사람'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어벤츄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상화되고 겉으로 보여지는 레이시오만 알고 있었다. 어벤츄린도, 레이시오도, 서로에 무지했다.

그래서 말 할 수 없었다. 이제와서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를 알아가서 어쩔거야. 어차피 자신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던져졌고, 죽을 이유밖에는 남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난 살아갈 이유보다는 죽어야할 이유가 더 많더라. 미련은 이미 꿈의 땅에서 한번 버렸어. 그러니까.."

"어벤츄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레이시오가 담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걸 담담하다고 할 수 있나?

"..너, 울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아랑곳 앉고, 레이시오는 조심스럽게 어벤츄린의 손을 제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손등으로 온기가 닿는 감각에 어벤츄린이 어깨를 조금 떨었다. 안돼, 잡지마. 더러워질거야. 자기가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인 손이야. 네가 잡을 만큼, 깨끗한게 아니야... 숨이 가빠왔다.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낀 듯, 레이시오가 조금 더 세게 손을 잡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울고 있으면서, 점점 더 서글픈 표정이 되고 있었다.

아, 나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지?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었나?"

"...너야말로, 왜 그런 말을 해?"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레이시오가, 왜? 자신이, 나 같은 사람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베리타스 레이시오는 충분히 사람들에게 우상이며 더없이 찬란한 진리의 별이었다. 어벤츄린에게는 그러했다. 옆을 걸으면서도 죄악감을 지울 수 없던 시간이 길었다.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에게 너는, 내 모든 시간을 전부 바칠 만큼 큰데. 나는 너의 살아갈 이유가 되지 못한건가?"

뭐?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벤츄린의 모든 감각이, 이 말을 들어선 안된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어, 네가 그를 거절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막아, 차라리 귀를 막아. 그의 입을 감히 막을 수 없다면 내 귀를 터뜨려서라도...

하지만, 그걸 행할 손 조차. 그의 손에 있었다.

"100일이라.. 확실히 긴 시간은 아니지. 하지만 결코 짧지도 않아."

"..레이시오. 그만."

"하지만 너라는 한 사람을 고찰하기에는 충분하지. ...하, 이 말도 100일 뒤에는 후회하게 될까? 200일이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면서."

"베리타스..제발..."

"태어난 이유 같은건 나중에 붙이면 되잖아."

"...너.."

"살아갈 이유도 만들어 갈 수 있어. 하지만 그 누구도 너에게 죽어야할 이유를 가르치지는 못할거야."

이 끝없는 우주에, 너에게 살 이유보다 죽을 이유가 더 많을리 없다. 당연하지 않나? 내가 그 모든 이유보다 더 크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감히 자신할것인데.

"나는 네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네게 살아라고 말할거야."

어벤츄린이 고개를 숙였다. 가까워진 호흡이 얽히고, 시선이 맞물렸다. 둘 모두,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니 내게, 그 시간동안 네가 살아갈 이유가 되는걸 허락해줘."

"...왜, 그걸 원하는데? 도대체 왜... 내가 그렇게 가치있는 사람이야?"

"넘치도록."

그리고, 이유를 물어본다면..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곤 느릿한 손으로 제 품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손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푸른 색 상자였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거짓말."

"타인의 감정을 거짓으로 치부하는건 좋지 못한 행동이라고 말해야하나?"

"...너 지금 진짜 바보같은거 알아? 범인원의 천재가 이런식으로 행동해도 되는거야?"

"알아. 너에게만 바보가 되는거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군."

"난, 이거 못 받아줘.."

"그것도 알고 있지.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냥, 내가 멋대로 고백한거지."

레이시오는 여전히 울며 웃었다. 그 표정이, 어벤츄린은 너무나 아득해서.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이 현실에서 도망칠 이유도 없었고,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당연하지 않던가, 그는 레이시오를 거부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의 이기심과 오만이라고 평가해도 할 말은 없어. 아직 너는 결정하지 못했고, 나는 너를 강제로 붙잡으려는 것에 가깝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살고 싶어져서 어쩔거야."

어벤츄린이 이를 악물었다. 울지 않으려는 듯 두 손을 꾹 쥐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보며 말 할 수가 없었다. 레이시오는 자신의 죽음에 슬퍼하는게 아니었다.

그는,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동안 어벤츄린이 혼자를 택했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왜, 하필이면 네가 슬퍼해?

"내 진짜 끝은 이미 정해졌어. 그걸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시작했어! 운명은 언제나 나에게는 불공평했지. 하지만 나는 끝까지 발버둥치며 살았어!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그분이 나를 부르시고 나는 남은 시간을..."

너를 낭비하며 살고 싶지 않아.
어차피 죽어, 어차피 너를 홀로 만들거야. 그런데 어떻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너무해, 비겁해!
너는, 내가 너를 거절하되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나에게 또 한번 미련을 가지게 하는구나.

"사랑하지마. 난, 대답도 못해줘. 네가 나 때문에 그런 기억을 가지게 되는 것도 견딜 수가 없어. 나는.."

"...삶을 단념하고 그저 얼마 남지 않은 하루하루를 사는 것 보다."

레이시오가 느릿하게 일어나, 침대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몸을 숙였다. 넓다란 등이 어벤츄린을 완전히 가리고, 어깨가 어벤츄린을 끌어안았다. 지척에 다가온 숨결에, 어벤츄린이 숨을 들이켰다.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끝없이 넓고도 깊은 바다가 그를 품어서. 아가미 없이 호흡하려 발버둥치다, 다시 그 무게에 심해로 가라앉으려는 것 처럼.

"경험하지 못한 것을 손에 넣어으며, 삶을 다시 되돌아 봐."

"...나보고, 지식을 탐구해보라는거야?"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내 1대1수업은 비싸지만, 너에게는 무료로 해줄 수 있지."

"....왜.."

이제, 왜 라는 물음은 의미가 없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나의 이기심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그러니.."

어벤츄린을 가둔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바다의 표면은 잠잠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아래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결국, 지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둘 다, 서로를 거절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나를 떠나지말아줘."

"둘 다,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니네."

"...."

"뭐, 어느정도는 해결 한 것 같으니 상관없어. 준비는 다 되었으니 원하는 때에 출발해."

제이드가 웃음지으며 상자 하나를 어벤츄린에게 안겨주고는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상자에는 '이별선물'이라고 적혀있었다.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직원 몇명이 하나 둘 모여서 준비한 선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방금 했던 대화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잊어버린 물건은 없나?"

"없어. ...너, 정말 괜찮은거 맞아? 이렇게 길게 휴가 낸 적 없잖아."

"쓸 일이 없어서 안 썼으니까. 이번에 몰아서 쓰겠다고 했어."

레이시오는 100일이 조금 넘는 장기 휴가를 냈다. 원래 컴퍼니에서 보장해준 휴가를 안 쓰고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다 써버릴 줄은 몰랐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다. 물론 금세 네 탓이 아니야 라고 덧붙였지만 어벤츄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어제 한참을 울고 난 후,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에게 여행 제안을 했다. 어디로든,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가자고. 마땅한 행선지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기에 수락했다. 가족을 만나기 전에,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해놓고. 그는 어떤 계획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울다 지쳐 함께 끌어안은 채 잠에 든 후, 다시 일어났을 때. 레이시오는 평소와 변함이 없었다. 먼저 일어나서 비어있는 냉장고를 확인하고는 혀를 차며 밖으로 나가더니, 크림수프와 구운 빵 같은 것을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입맛이 없었지만 먹지 않으면 끝까지 노려볼 것 같아 깨작거리고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 한 듯 제 몫을 먹기 시작했다.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아...'

어제의 일을 신경 쓰는 것은 자신 뿐인 것 같아 어벤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창피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니, 어제 그렇게 고백해놓고! 싸우고 울고 지쳐 잠들었는데 쟤는 왜 저렇게 멀쩡해? 제이드가 지적한 얼굴-울어서 눈이 빨갛게 부었다-정도를 제외하면 레이시오는 평소의 지적이고 침착한 학자였다. 평소보다 가벼운 셔츠에 자켓을 걸치고, 어벤츄린 몫의 여행 캐리어까지 끌고 있다는 점도 제외해야했지만..

캐리어에 담을 것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옷은 여행에 걸맞지 않고 입을 일도 없는 화려한 것들이라 처분했다. 장신구도 마음에 들었던 몇개를 제외하고는 팔아 치웠다. 재산 절반이 말이 그런거지, 여행 경비로 쓰기에는 너무 많았다. 나중에 은행 계좌도 처리해야할텐데..

"...."

"왜 그렇게 보는거야, 교수 양반. 내 얼굴 엉망인거 나도 알아."

"아니, 너는 이제 어벤츄린이 아니니까. 뭐라고 불러야할지 몰라서."

솔직한거 봐라... 대놓고 물어보네.
[어벤츄린]의 자리에 있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컴퍼니를 나왔으니 당연하게도 그는 [어벤츄린]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뭐지? 카카바샤로 돌아가는 걸까?

"...그냥 어벤츄린이라고 불러. 그쪽이 더 편하잖아."

"...그러지."

"그래서~! 우리 고집 센 교수양반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실 생각이실까?"

"전에 눈이 보고싶다고 했었지. 토파즈가 야릴로-Ⅵ를 추천하더군."

"걔 거기 마음에 들었나..."

"호텔 예약도 해뒀어. 방한 외투도 있고..."

"너 솔직히 말해, 언제부터 계획한거야.. 사실 내가 퇴사할거 알고 있었지?!"

"너랑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

"이만 출발하지. 좌표는 설정해뒀어."

레이시오가 캐리어 두개를 들고 우주선에 올라가는 것을, 어벤츄린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정말. 나를 죽일 사랑이 너였다면 좋았을텐데."

이런 중얼거림은, 곧바로 잊었다.
어벤츄린은 레이시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눈물 젖은 고백을 들었을 때, 어벤츄린은 그저 혼란스러웠다. 왜 네가 나를 사랑해?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어놓아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판을 짜면서 간과한 단 한가지가, 레이시오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라는 가설이라는 것을. 어벤츄린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 나같은 걸 사랑하는걸까. 물어봤자 대답도 안해줄 것 같았고 물어볼 용기도 없었기에 어벤츄린은 눈을 꾹 감았다. 홀로 츠가냐로 떠나서, 100일 간 쥐 죽은 듯 숨만 쉬고 있을 생각이었다. 남은 미련으로 샀던 사막 근처 별장에서 비가 오는 날을 기다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했다.

너는, 끝까지 나의 곁에 있을 생각일까.
눈을 뜨고 우주선에 올랐다. 어벤츄린 소유의 개인 우주선은, 주인의 대외적 이미지와는 달리 외관은 소박한 편에 가까웠다. 본래 관광용으로 설계되었던 우주선이었기에 물자만 충분하다면 우주를 떠나니며 몇주는 생활 할 수 있을 정도의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워프기능도 있었기에, 좌표만 알고 있다면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말 그대로 우주의 별 만큼 많았다.

"개척자에게서, 선주 나부의 찻집을 추천받았어."

"선주라...가본 적 없는데."

"그럼 다음은 거기로 하지. 최근 정세도 있어서 미리 입국 신청을 넣어두는 것도 좋겠군."

"왜 그렇게 성급해? 바로 갈 것도 아니잖아."

"시간은 소중히 해야지. 그리고, 은하열차에서 너를 초대했어."

"..엥? 은하열차? 왜??"

"네가 퇴사했다고 했더니, 개척자가 열차에 놀러오라고 하는군. 다른 탑승객들도 동의했다는데. 궁금해하지 않았나? 은하열차."

"그러긴 했지... 이렇게 정말 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너는 내 퇴사 소식을 어디까지 말하고 다니는거야?"

"너를 아는 사람들에게. 네가 이야기할리 없으니까. 열차는 30일 뒤 우주정거장 헤르타에 들러 물자 교환을 한다고 하니, 그때에 맞춰 가지."

"...어어..그래.."

어째, 나보다 더 여행을 즐기는 것 같은데 이녀석...

우주선이 미약한 고동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피어포인트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승강장에 익숙한 얼굴들이 서있는 것 같았으나,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인사를 나눈 사람은 극히 적었으니까, 이제와서 후회한들 우주선을 돌릴 수는 없었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창 밖만을 보고 있으니, 레이시오가 머그잔 하나를 건네었다. 향긋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캐모마일."

"..고마워."

"가고 싶은 곳은 더 있나?"

자연스럽게 옆 자리에 앉은 레이시오가 제 잔을 테이블에 놓고 말했다. 차를 한모금 마신 어벤츄린이 눈을 깜빡였다. 가고 싶은 곳. 생각하지 않았기에, 조금은 긴 침묵이 이어졌다. 어디를 가야하지. 내가 거길 가서 뭘 하지? 남는 것도 없을텐데. 애초에 정말 너를 데리고 가도 되는건가? 지금이라도 우주선을 돌려서...

찰칵

셔터음이 들려, 어벤츄린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들고 있던 레이시오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고민하는 표정이 귀엽길래."

"..너, 너어...!!"

"남는 건 많아. 사람은 죽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

레이시오가 인화된 사진을 몇번 흔들고는 어벤츄린에게 건네었다. 측면으로 찍힌 사진 속 자신은, 누가봐도 고심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나, 이런 표정이었던건가? 그러고보니 최근 거울을 거의 안봤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을 뻔 했다. 손 안의 사진을 다시 가져간 레이시오가 테이블에 사진을 올려두고는 카메라를 한번 확인 했다.

"...레이시오. 솔직히 말해. 왜 그러는거야?"

"사랑한다는 말을 또 들어야겠나?"

"감정이 아니라 이유를 묻고 있는거야."

"...흐음."

카메라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레이시오가 소파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에게 삶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듯, 나에게도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다지 하고싶지 않은 말을 한 듯이. 레이시오가 표정을 약간 찌푸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벤츄린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채 고개를 숙였다. 그렇구나, 이별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그렇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레이시오가 나에게 보여준 작은 상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어벤츄린이 고개를 들었다. 우주선 내부는 조금씩 온기가 가득차고 있었고, 자신은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레이시오, 내 사랑을 네가 알게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겠지만.. 나는 너에게 다음이 있으리라 믿었다.

"줘봐."

어벤츄린이 손을 내밀었다. 레이시오가 잠시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을 올리자 어벤츄린이 과장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말고, 카메라 달라고."

"...아.. 여기."

멋쩍은 표정을 한 레이시오가 카메라를 건네고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 엄청 부끄러워하고있겠지. 불보듯 뻔했다. 카메라를 조금 만지작 거리던 어벤츄린이 렌즈를 반대로 돌려 제 쪽을 향하게 했다.

"레이시오."

제 목소리에 레이시오가 고개를 돌리자, 그에게 가까이 붙어 어깨를 감싸고는 얼굴을 옆에 붙였다.

찰칵

짧은 셔터음이 들렸다. 갑작스러운 일에 레이시오가 놀란 눈으로 어벤츄린을 바라보았으나, 어벤츄린은 아랑곳 않고 인화된 사진을 바라보았다. 둘다 아직 눈가가 붉었고, 한명은 울기 직전의 어정쩡한 미소에, 한명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카메라가 아닌 사람을 보고있었다. 어디 내놓지도 못할 만큼 엉망인 사진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에 들었다. 꾸며진 것은 하나도 없이 온전한 그들을 담고 있었다.

"이거, 그냥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라진다던데."

"...하하, 앨범을 하나 구해야겠군."

우주선은 야릴로-Ⅵ의 위성궤도를 하루 정도 돌다가, 벨로보그 인근의 설원에 착륙했다. 피어포인트에서 출발한지 5일만이었다.
토파즈의 배려로, 벨로보그의 수호자에게 이야기가 닿아 출입은 이미 허가 받았고 호텔도 좋은 방을 예약 할 수 있었다. 레이시오는 우주선을 내리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보라가 치지 않는, 비교적 좋은 날씨였다.

"우와아..."

두꺼운 털이 달린 외투에, 목도리에 부츠까지 착용당한 어벤츄린이 조심스럽게 설원에 첫 발을 내딛었다. 컴퍼니 업무의 일환으로 여러 행성을 오고갔으나 눈을 볼 일은 없었다. 대체로 행성의 기온이 온난했고 과하게 도시화가 진행되었거나 과하게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렇기에, 어벤츄린은 지금 눈을 처음 본 어린아이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진짜 새하얗다.. 눈이 멀 것 같아. 선글라스 껴야하나?"

"날씨가 좋으니 빛때문에 눈이 아플 수 있어. 여기."

"오, 고마워 교수양반!"

레이시오가 작은 여행용 가방에서 선글라스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어벤츄린이 자주 하고다니던 불투명한 선글라스였다. 다른 것들은 거의 다 처분하면서도, 이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남겨둔 것이었는데. 이걸 여기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어벤츄린은 선글라스를 끼고, 조심스레 눈을 밟기 시작했다.

뽀득, 뽀득

신기한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해야할까, 스티로폼을 정리할 때에 비슷한 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그것보다는 자연스럽고 귀여운 소리였다.

찰칵

"...이젠 아주 시도때도 없이 대놓고 찍는다?"

"너도 내가 씻고 나오는걸 찍었으니 이정도는 해야지."

야릴로-Ⅵ로 오는 5일 동안, 두 사람은 나름대로 함께 생활하는 것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둘 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본 적이 없다보니 길을 떠난 이후 자잘한 마찰이 있었다. 식사는 같이 하자는 레이시오의 주장으로 같이 밥을 먹긴 했지만, 어벤츄린의 먹는 양이 레이시오에 비해서는 현저히 작았다. 매 식사마다 한입만 더 먹어라를 당한 어벤츄린은, 어쩌면 레이시오가 자신을 굴러다니게 만드려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레이시오는 나름대로 걱정이 점점 늘기만 했다. 죽을 때를 아는 사람이나 동물은 먹는 양이 줄어드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레이시오는 지금 원래 어벤츄린이 먹는 양이 적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평소의 화려한 복장이 아닌 편안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우주선을 돌아다니는 어벤츄린을 보며 툭 치면 어디하나 부러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어벤츄린은 그렇게 약하지 않고, 오히려 몸싸움에서 레이시오보다 나을 것이지만.

"오, 레이시오! 저기 봐! 작은 동물이야. 토파즈가 곰 이라고 했었어!"

한번 해보고 싶었다며 눈 밭에 드러누워서는 팔 다리를 휘적거리며 천사모양을 만들던 어벤츄린이 벌떡일어났다. 묵묵히 사진을 찍던 레이시오는 아쉬운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어벤츄린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일어나 다가가려는 어벤츄린의 목도리를 잡고 고개를 도리 저어보이고는 웃으며 말했다.

"부모가 근처에 있으면 공격받을거야. 놀랄테니 다가가지 말고 보기만 해."

"헉, 그렇지. ...귀엽다~ 자고 있나봐."

우주선에서 조금 떨어진 눈 밭에서, 작은 아기곰이 나무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얀 털이 눈 밭에서 생존하기에는 좋아 보였다. 야릴로-Ⅵ의 스텔라론 사태가 해결되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나, 서서히 행성은 회복되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그렇지만 확실하게. 레이시오는 아기곰을 바라보며 사진을 한장 찍고 있는 어벤츄린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너도 스스로를 온전히 사랑하며 삶을 그려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만 가지. 해가 지면 위험해질거야. 너, 지금 볼이 엄청 빨개졌거든."

"..어, 그래? 추위는 익숙해졌는데."

"이렇게 붉어질 줄 알았으면 볼싸개라도 챙길 걸 그랬나?"

"누굴 어린애 취급하고 있는거야."

레이시오의 어깨를 약하게 때린 어벤츄린이 벨로보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눈에 파묻힌 주거시설과 얼어붙은 반물질 군단의 잔해가 보였으나 그리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한 행성의 역사는 적어도 어벤츄린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 이번에는 레이시오가 중간중간 걸음을 멈췄다. 스텔라론의 영향으로 한파가 뒤덮은 행성에서, 얼어붙어있는 반물질 군단의 잔해는 흔히 볼 수 없었다. 야릴로-Ⅵ의 문은 최근에 열렸으므로 보지 못한 표본도 제법 널려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걸음을 멈추어 한번 살펴볼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궁금할 법도 한데, 어벤츄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시간을 아끼고 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벨로보그 상층구역에서 호텔 체크인을 마친 레이시오가 짐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벤츄린은 저 멀리 광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도시 내부는 바깥에 비해서는 그리 춥지 않았기에 어벤츄린의 표정은 한결 편했다. 운명의 길에서 나온 힘을 사용하더라도, 어느정도 방한 대책은 있어야 한다는 레이시오의 말은 정답이었다. 야릴로-Ⅵ는 정말 추웠다. 츠가냐 출신인 어벤츄린도 사막의 추위는 알았지만, 얼음이 주는 추위는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에어컨을 틀고 찬물 샤워를 해도 이정도는 아니겠다.. 이정도가 어벤츄린의 감상이었다.

"교수양반. 저기 가게가 있더라. 뭐라도 먹을래? 신문 필요한가?"

"배가 고프다면, 야릴로-Ⅵ에 파견 왔던 직원이 이야기했던 가게가 있는데."

"으음.. 그렇게까지 배고프지는 않은데.. 아, 저기 서점이 있더라."

"흥미롭군."

"그럴 것 같았어."

광장 한 켠의 벤치에서 일어난 두 사람이 가벼운 걸음걸이로 광장 한 쪽에 있는 서점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벨로보그에는 꽤 오랜 시간 휴대용 통신장비가 보급되지 않아 독서가 보편적 취미가 되었다던가. 레이시오는 벨로보그가 마음에 들고 있었으며, 어벤츄린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토파즈는 여기가 자기 고향 같아서 마음을 썼던 것 같은데.. 적어도 벨로보그는 상층과 하층의 갈등이 해결될 양상을 보이며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다. 츠가냐는 지금 어떨까, 짧은 감상이었다.

서적 판매상 피즈는 두 사람이 책을 둘러보건 말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찾는게 있다면 불러 달라는 말만 하고는 자신이 책을 읽는 것에 열중했다. 레이시오는 개의치 않고 서점을 둘러보며 벨로보그의 문화가 담긴 책들을 눈에 담고 있었다. 어벤츄린은 저렇게 책이 좋을까... 라고 중얼 거리며 대충 책장을 훑고 있었다.

"오."

[봄과 전쟁의 신 야릴로]

제법 오랜 시간 축성가의 비호를 받으며, 한파 이전에는 컴퍼니와도 제법 교류가 있었을텐데. 이런 민속신앙도 존재했던걸까. 어벤츄린은 책을 집어들어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신화의 내용은, 윤회를 거듭하는 오만한 신 야릴로가 잘못을 범하고 절망하다 후회하며 스스로를 바쳤다는 내용이었다. 야릴로는 아내 모라나에게 충실하지 못했고, 모라나는 결국 남편을 살해하지만 그들은 다시 살아나 윤회했다. 끝내 모라나는 분노가 극에 달해 스스로를 저주하여 살아나기를 포기하며, 그녀가 저주하여 땅에서 봄이 사라졌고 야릴로는 잘못을 후회하며 아내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다음을 포기했다. 아내에게 바치는 영원한 맹세였다.

그 신의 후회와 그리움은 봄이 되어 벨로보그 대지에 머무르며 눈보라 몰아치는 이 세계를 수호하고 있다.

"...죽어서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건가?"

해석본은, 신흥종교가 기존 종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석했다. 야릴로는 방탕한 남편에서 일편단심의 남편으로 변해갔고 이것이 한파 이전에는 관측 가능했던 달이 한파 이후 관측이 불가하게 된 영향이라고도 해석했다. 하늘이 막혔으니, 달을 투사하던 야릴로의 이미지 또한 그에 맞추어 변한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틀어지고, 상처받고, 상처를 주고난 뒤에야. 잘못을 깨닫고 속죄하며 사랑한다라..."

신들의 사랑이라는 것도, 뭐 대단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인간 세상과 별 다를게 없지 않나?
당장 옆에서 책에 정신이 팔려있는 교수양반은 내가 아무리 모질게 굴어도 진짜 석고상인지 스펀지인지 꿈적도 안하고 있는데. 나는, 레이시오에게 사랑을 줄 자격이나 있을까.

"왜 그러지? 책은 고른건가?"

"..아, ..아니. 난 역시 책은 그리 끌리지 않네."

"재미있게 읽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걸 또 언제 보고있었대.."

"난 너와 함께 있을 때는 너를 더 많이 봐."

"말이나 못하면... 이거. 살거야."

"...신화인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축성가가 자리잡은 행성에 전통 신화가 있는데 신기할 뿐이야."

"흐음.. 그럼, 이거랑 이거. 계산 부탁합니다."

"...너 그거 다 가져갈거야?"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이 들고 있던 책을 제 앞의 책 더미에 올려두었다. 어벤츄린이 질색하는 것에는 아랑곳 않고 계산을 마친 레이시오는 양이 많으니 괴테 호텔의 방으로 배달해달라는 신청까지 마친 후 유유히 서점을 벗어났다.

"호텔에서 책만 볼거지?"

"자기 전에 읽어줄까? 잠이 잘 올걸."

"됐어.. 딱 봐도 어려워보이는 책만 잔뜩 사는걸 봤는데 무슨.. 꿈자리만 사나워져~"

"하하."

짧게 웃은 레이시오가 한 쪽에 시선을 멈추었다. 서점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의 끝에, 벨로보그와는 다소 동떨어진 풍경이 있었다.

"꽃집, 애버 썸머 라는데?"

"벨로보그는 외관 설원과는 달리 비교적 온난하니 꽃도 팔 수 있나?"

"들어가볼까? 꽤 종류가 다양해보여."

레이시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어벤츄린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꽃집의 문을 열었다. 여러 꽃과 식물이 즐비해있는 모습은 눈이 몰아치는 바깥과는 정말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본적 없는 꽃과 풀이 가득해 어벤츄린이 조금 신이 난 듯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벨로보그에서 꽃은 사치품이었기에, 가게 내에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 넓은 가게는 아니었기에 어벤츄린은 한 구석에 핀 이름모를 꽃을 조금 오래 구경하기로 했다. 가끔은, 반짝이는 금이나 보석보다 이런 꽃 한송이가 더 아름다워보이곤 했다. 아, 이건 누나가 좋아할 법한 꽃이네.

"응?"

레이시오가 점원과 무어라 대화를 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뭐, 마음에 드는 화분이라도 있었나? 모르는 척 다른 꽃을 보고 있었더니, 이젠 아예 꽃다발 하나를 받아 들고 있었다. 손에 들린 분홍색 꽃은, 아직 꽃피우기 전인 것 같았다.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피기 전의 꽃은 볼 일이 없다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뭘 산거야?"

"...너 줄거."

"...세상에, 너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어? 몰랐는데.. 꽃 선물도 할 줄 알고..."

"아직 필 때가 아니라는 군. 1년에 딱 한달만 피어있는 꽃이라는데.. 앞으로 두달은 있어야한다는 군."

"뭐, 괜찮지 않아? 아슬아슬하지만 피어있겠네."

"...관리하다가, 피었을 때 줄게."

"지금 줘도 되는데. 뭐, 상관없지. 알아서 해~"

어벤츄린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살며시 만져본 제 얼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꽃? 꽃 선물?! 베리타스 레이시오가?! 심지어 둘 중 누구와도 전혀 닮지 않은 분홍색 꽃을 샀어? 어벤츄린은 당장 휴대폰을 들어 개척자에게 문자를 넣기 시작했다. 레이시오가 퇴사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야릴로-Ⅵ에 오는 내내 삐져버린 개척자 친구를 달래기 위해 임시 계정을 만들어 놓아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리고 어벤츄린 자신은 벨로보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물어볼 사람은 한명 뿐이었다. 레이시오가 산 꽃을 찍어 보내니 한참을 답장이 없던 개척자로부터 답장이 돌아왔다.

[그거 둥근 모란이네요. 연인에게 선물하는거래요. 전에 꽃집에서 꽃말을 봤는데.. 아마 짧은 영원, 영원한 사랑 이었을거에요. 둥근모란 앞에서 프러포즈하면 사랑이 영원히 지속된다나?]

[정말?]

[네. 안내서를 받았어서, 서재에 등록해두었던걸 확인하고 왔어요. 교수님 좋아하는 사람 생겼대요?]

[어..그런가봐.. 고마워 친구. 나중에 선물 가지고 갈게.]

[네. 어벤츄린씨도 즐거운 여행되세요. 나중에 봐요.]

"....하아...그게 나래.. 미치겠어 정말.."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텐데. 레이시오의 진심만 확인한 꼴이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 주라는 말도 안 통하는 상대라 더더욱 골치가 아팠다. 고백 이후, 레이시오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우주선에서 항해를 할 때에도 이전과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다. 대놓고 자신을 챙기고는 있었지만 예상범위 내였다. ..쟤, 언제부터 날 좋아했던거지?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고 있었던건가? 제이드의 번호는 이미 차단되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토파즈는 그런거 물어보지 말라고 할텐데. 새삼 짧디 짧은 자신의 인간관계가 개탄스러워져 어벤츄린은 손으로 얼굴을 쓸며 꽃집을 나섰다. 꽃이 시들이 않도록 조치를 취하던 레이시오가 그를 뒤따라 꽃집을 나섰다. 설원에서 눈 구경을 오래 해서인지,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밤에는 더 추워질거야. 이제 들어가자."

"...응. 그러자."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건 이 추위 때문이다. 그럴 것이다.

두 사람은 야릴로-Ⅵ에서 자그마치 한달을 보냈다. 본래 길어봤자 10일을 보낼 생각이었으나 예상 외로 어벤츄린은 눈을 좋아했고 레이시오는 그것을 말릴 생각이 별로 없었다. 벨로보그는 이제 막 활기를 되찾아가는 중이었기에 사실 관광으로 돌아다니기에는 꽤 한정적이었지만, 어벤츄린이 하루의 절반을 눈 구경에 쓴 것만 자그마치 일주일하고도 5일정도였다. 어느 날은 눈사람을 열개정도 만들고 지쳐 쓰러진 후 하루를 방안에서만 보내기도 했고, 레이시오가 사온 책이 궁금하다며 읽다가 까무룩 잠들고 밤을 지세우는 바람에 혼이 나기도 했다. 어디선가 사온 눈오리 만드는 기구로 외곽설원에 나가 눈오리를 하루 종일 만들고 다니기도 했다.

하층구역을 둘러보기 위해 호텔을 하층의 괴테 호텔로 옮긴 후, 어벤츄린은 더 바쁘게 돌아다녔다. 열계의 괴물들을 처리하며 사람들을 돕기도 하며 후크를 비롯한 어린 아이들에게 잡혀 개척자 대신 두더지파의 임무를 돕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은 하층구역으로 내려가 돌아다니던 중 격투클럽에 잘못 들어가 정신차리고 보니 링 위에 서버린 것을 본 레이시오가 5분 정도 석고상을 쓰고 있기도 했다. 결과는 물론 어벤츄린의 승리였다. 아무리 단련된 사람이라고는 해도, 결국 상처는 나기 마련이듯. 어벤츄린도 이곳 저곳 생채기가 있었기에,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이 내려오자 손을 붙잡고 하층구역의 진료소를 찾았다. 의사의 처치를 받는 와중에 재미있어 보여서 올라갔다, 라는 말을 들은 레이시오가 겨우 벗은 석고상을 다시 쓰고는

"너한테 화내기 싫으니 잠시만 저 쪽에 가있을게."

라고 말하고는 진료소 한 쪽 구석에서 한숨만 10분을 넘게 쉬고 나온 이후. 어벤츄린은 하층구역에 있는 동안 격투 클럽 쪽으로는 가지도 않았다. 진료소의 의사라는 나타샤에게서도 뭔가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았으나 레이시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벤츄린이 총알이 떨어져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처음본 레이시오가 너무 놀라고, 싸우는 방식이 너무나 생존특화여서 마음이 안좋아 그랬다는 것은 호텔 체크아웃을 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런 나날을 보내면서, 벨로보그를 즐기니 20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어벤츄린의 작은 여행용 가방은 점점 물건들로 가득찼다. 여행 초반에는 어차피 필요없어질 것 이라는 이유로 사지 않던 물건들을 결국 사오거나 했더니 올 때는 가볍게 떠날 때는 무겁게 라는 말을 실천하고 있었다.

"안 산다더니."

"조용히 해 교수양반."

하층구역의 아이들을 놀아주고 받은 작은 종이비행기나 새로 개장했다는 박물관의 팜플렛 같은 것도 꽉 찬 여행가방에 들어있었다. 눈오리를 만드는 기구는 모래로도 할 수 있다는 말에 챙겨넣어 가방 한쪽에 삐져나와있었다.

나름의 좋은 추억이 쌓였다, 어벤츄린은 이것이 좋으면서도 씁쓸했다.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있을까. 살아있는다고 컴퍼니에 재입사 할 것도 아닐텐데, 가끔 놀러오는 것도 좋을것 같았다.

"..."

아, 이런 미련이나 소망이 남는게 싫었는데. 그랬는데.
레이시오가 우주선을 점검하는 동안, 어벤츄린은 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벨로보그에서 구한 앨범에 그동안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붙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찍은 사진, 엉망으로 찍은 사진, 벨로보그에 처음 도착했을 때 찍은 사진...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앨범이 벌써 다섯페이지나 채워져있었다. 폴라로이드사진이라 비교적 많이 붙였는데. 대부분 레이시오가 찍은 자신의 사진이어서,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졌다.

침대에서 앨범을 살피며 뒹굴거리고 있으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부 선주는 가까우니, 도착하는데 하루면 될거야."

"응~ 나부에서는 얼마나 있을거야?"

"네가 원하는 만큼. 그 동안 네가 원하는 다음 행선지를 생각해둬."

레이시오가 말을 마친 듯, 저벅 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누워있던 어벤츄린이 갑자기 일어나 허겁지겁 방문을 열어 젖혔다.

"레이시오!"

"음?"

"나, 바다에 가고싶어."

"...그래. 좋은 경치를 가진 해양행성을 찾아보지."

"..응."

살짝 웃음지은 레이시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고 나서야, 어벤츄린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괜히 말했나, 하는 후회는 이미 늦었다.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이 한 말을 잊는 법이 없었다. 지나가듯이 닭꼬치를 먹고싶다 라고 말했더니 도대체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자신의 앞에 가져오기도 했었지... 기왕 이렇게 된거 잔뜩 부려먹어 정을 떨어뜨리자! 라고 생각하던 어벤츄린의 시야에 상자 하나가 들어왔다.

"..아. 저거 확인도 안했구나.."

피어포인트를 떠날 때, 직원들의 이별선물로 받아온 상자였다. 먹을건 안들어있겠지, 한달이나 지났는데.. 레이시오와 함께 여행을 간다는 생각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열어보지조차 않았던 것이 떠올라 조금 걱정스러웠다. 테이블에 상자를 올려두고,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보았다.

"..이건.."

편지 한뭉치와 신발 한 켤레, 향수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대부분이 소모품이거나, 단순한 장식품이었다. 편지는 그와 나름 친분이 있던 직원들이 쓴 것이었고, 신발은 구두 밖에 없는 어벤츄린을 걱정한 토파즈의 선물이었다. 자신의 사이즈에 맞는 운동화였다. 향수는 어벤츄린을 가장 오래 보조해왔던 수행원이 넣은 듯 했다. 자신이 쓴 적 없는 산뜻한 향의 향수였다. 마개에 묶인 작은 메모에는 '레이시오 교수님이 이 향을 좋아하셨습니다!' 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니 그걸 왜... 역시 레이시오의 연심은 피어포인트의 모두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야, 나만 몰랐던거 맞는거야?

"...어.."

상자를 확인하던 어벤츄린이, 신발이 담겨있던 상자에 들어있던 또 다른 상자를 발견했다. 자신이 사무실에 두고온 것이었다. 레이시오에게 선물 하려다 포기한 터키석 귀걸이였다. 누나에게서 배운 에브긴 양식의 매듭을 잊지 않으려 여러 방식으로 되새기던 중 잘 만들어진 것이라 레이시오에게 선물하려던 것이다. 비록 그가 이것 때문에 귀를 뚫을 것 같지 않고, 안 쓴다고 거절 할 것 같아 시도조차 안했지만. 상자와 함께 또 다른 메모가 있었다.

[줄거면 확실하게.]

제이드의 필체였다.

"...어떻게 줘..이걸..."

모든 것이 자신의 유품이 될 텐데. 이걸 어떻게 줘..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에게,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은데.

먼저 입국 신청을 넣어놓은 덕에 나부는 제법 간단한 절차만 거친 후 들어갈 수 있었다.
스텔라론에 의한 소동이 어느정도 회복 되었는지 나부는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금 조각상 거리가 정말 재미있다던데, 개척자의 소개라면 믿을만 하겠지. 재미를 찾아다니는 것이라면 일등상을 주어도 되고, 가끔은 스스로 그런 장소를 만들고 다니는 사람이니까.

어벤츄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옷의 치수를 재어지고 있었다.
선주에 왔으니 선주의 옷을 입자는 레이시오의 요구였다. 아니, 그게 뭐 큰 상관이 있나? 그냥 너가 보고싶은거 아니냐는 물음에 레이시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 자식이?
레이시오는 이미 자신이 입을 옷을 골라 갈아입고 나온지 오래였다. 검은색 베이스에, 파란색과 금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선주 양식의 복장이었다. 참 자기한테 어울리는거 고르는데는 재능이 있다니까... 저 어깨선 딱 떨어지는거 봐라, 근데 가슴이 안맞아서 벌어져있네...

"어때?"

결국 어벤츄린은 옷가게에서 선주의 옷으로 갈아입혀졌다. 전체적으로는 흰색 베이스에, 부분적으로 녹색과 검은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생각 이상으로 움직이기에 불편이 없었다. 한바퀴 빙글 돌며 어떠냐는 질문을 던진 어벤츄린은, 대답이 없는 레이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야, 별로인가?

찰칵

짧은 셔터음이 들렸다. 카메라는 언제 꺼낸거야?

"레이시오?"

"...예쁘네."

"..."

교수야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

놀라운 이야기지만, 나부는 어벤츄린에게 그리 즐겁지 않았다. 정확히는 즐겁긴 했으나 그렇게 새롭지는 않다 정도였다. 선주의 문화나 먹거리는 제법 마음에 들었지만, 이미 컴퍼니와 오랜 시간 교류를 하던 곳이라 그런지 익숙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개척자 추천의 소다 두유를 마시고 조용히 석고상을 쓰는 레이시오는 제법 웃겼지만. 장낙천이나 금 조각상 거리를 돌아다니며 배를 채우다가, 불꽃놀이를 구경한 것은 좋은 추억이었다. 불꽃놀이를 보는 와중에도 레이시오는 사진을 찍었지만. 제법 잘 나온 사진이라 불만은 없었다.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는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이번에도 서점을 찾은 레이시오에게, 로맨스 소설을 추천했다가 후회를 하고. 별땟목을 타러 갔다가 뭘 잘못 누른 것인지 튀어나온 풍요의 흉물인지 하는 것과 싸우고 나니, 별땟목에 올라서는 기운없이 천장만 보고 있었다. 밤에는 선야 대로에 나와 야경을 보며 실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여기 도박장은 없어?"

"개척자 말로는 도박하는 친구는 있다는데. 제원 경옥패"

"소개 좀 해달라고 해줘."

"하다가 업무태만으로 해고당할 뻔 했다고 안된다는데."

"아..."

이상하게, 그런 일상을 보냈음에도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나부의 주요 관광지만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무려 20일이나 나부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벤츄린은 큰 감흥이 없던 일상이었는데, 이상하게 남는 기억은 많았다. 레이시오가 장낙천에서 만난 유사를 끊임없이 노려보기에 그걸 데려오느라 진땀을 뺀 일이라던가, 결국은 청작을 만나 제원 경옥패를 했던 일이라던가. 새로운 것은 없었으나, 나부에 있는 동안 사진을 많이 찍었던 모양이라 어벤츄린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새로 종이를 채워넣었다. 앨범은 벌써 절반이 넘게 채워져있었다.

"열차가 곧 우주정거장에 도착 한다는 군."

"그래? 그럼 슬슬 준비해야겠네. ...으음..."

"챙길게 더 있나?"

"...태복사의 친구랑 제원 경옥패 한 판만 더 하고.."

"망할 도박꾼...."

"교수야 내가 진짜 따악 한판만!"

"안돼."

어벤츄린은 레이시오에 대한 평가에 잠시 제외 시켰던 [쪼잔이] 를 다시 추가했다.

우주정거장으로 향하는 동안, 어벤츄린은 야릴로와 나부에서 있었던 사진을 정리하거나 선물들을 가지고 놀며 시간을 보냈다. 매일 식사는 레이시오와 함께 하여, 이제는 익숙한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의 먹거리 취향을 잘 알고 있었고, 늘 그에 맞추어 식량을 조달하곤 했다. 어벤츄린은 레이시오가 생각보다는 단 음식을 선호하며 가리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가 아닌 물 한잔을 하는 것은, 아마 자신을 챙기다가 옮은 버릇같았다.

우주정거장에는 이미 은하열차가 도착해 있었다. 맞추어서 출발하기는 했으나, 궤도가 조금 멀어서인지 이동하는데에만 8일정도가 걸렸다. 레이시오가 정거장에서 우주선을 점검하는 동안, 어벤츄린은 열차팀에게 줄 과자세트를 챙기고 있었다. 정거장 책임자 아스타는 어느정도 안면은 있었고 여기까지 토파즈의 말이 닿은 것인지 아스타는 어벤츄린에게 호의적이었다. 새삼, 토파즈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착하게 살지 말라고 한 자신이 너무나 작아보였다.

짧은 준비를 마친 후, 열차가 정차한 승강장으로 함께 걸어갔다.

"어벤츄린씨~ 여기요~"

"..오, 친구~!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저야 뭐 늘 잘 지내죠. 안녕하세요 교수님! 여행은 어떠세요?"

"안녕. 뭐, 좋지."

"와, 이거 진짜 만족하는건데?! 어벤츄린씨랑 사이가 좋은거죠! 역시 그런거죠?"

"자,자~친구. 어서 가야지! 열차 사람들한테 인사도 해야하잖아."

"어, 네! 그래야죠!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회색머리의 개척자는 오늘도 활기가 넘쳤다.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개척자는 어벤츄린에게 호의적이었다.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는 건지,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편이 아닌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개척자는 어벤츄린이 그 속을 읽기 힘들어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탱탱볼 같달까..

은하열차의 문이 열리고, 개척자가 먼저 탑승했다. 열차는 그 모습을 본 횟수도 극히 적었던지라,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타도 되는건가? 그런 고민을 하며 계단 앞에서 주저하고 있자,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의 어깨를 잡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얼굴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어느 순간부터였더라. 네가 나를 보고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게되고.. 오히려 미소를 짓기 시작한게.

정말, 언제였지?

"걱정마. 열차팀은 중대 사항은 투표로 결정한다더군. 너를 초대하는 일도 과반수 이상의 투표를 얻어서 가능했던 일일거야."

"...그래? ...너는 열차에 자주 왔어?"

"나는 방문객 허가증이 있으니까. 간혹 아카이브를 둘러보곤 했지."

"..그거 부럽네. 우리 친구랑 사이가 좋은가봐?"

"나쁜 편은 아니지. 그는 가르칠 맛이 나는 학생이거든.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자세는 칭찬 할 만 해."

"흐응~... 그래? 나한테는 칭찬 한마디 없더니. "

"...질투하나?"

"....!!!미쳤어?! 갑자기 그런 말이 왜 나와!! 됐어! 빨리 타기나 해!!"

어벤츄린이 레이시오의 팔을 내리고는 쫓기 듯 열차에 올라탔다. 안쪽에서 뭔가 터지더니,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레이시오는 잠시 그 소리에 섞인 어벤츄린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열차칸에 드러섰다. 관람칸과 객실칸을 나누는 문, 그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에 둘러싸여 웃고 있는 어벤츄린이 보였다.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아마 이런 대우를 받을 줄은 몰랐기에 저러는 것이겠지.

열차팀은 어벤츄린을 환영했다. 퇴사한 이유를 끈임없이 물었으나, 어벤츄린은 일관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지쳤다, 나도 좀 놀고 먹고 싶었다 같은 대답이었다. 식당칸에서는 차장이 선심을 써 무려 차장 전용 따끈따끈 바삭바삭 폼폼폼폼파이를 나누어 받았다. 어벤츄린이 파이의 맛에 감탄하는 동안, 히메코의 커피를 맛본 레이시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벤츄린 몫의 우유를 받아왔다. 웰트가 소소한 위로를 건넸다.

가벼운 식사를 마친 후, 은하열차는 정거장을 벗어났다. 우주를 항해하는 열차인 만큼, 잠시 정거장을 벗어나 더 블루의 위성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열차팀의 배려였다. 열차팀의 일도 있었으므로 기간은 하루 정도였으나, 어벤츄린은 그것 만으로도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이런 배려는, 정말 생각도 못해봤으니까.

단항의 추천으로 레이시오는 아카이브를 둘러보고, 어벤츄린은 그간 찍은 사진을 March.7와 공유했다. 그녀가 찍은 사진을 살피던 어벤츄린은 자신의 사진도 있다는 것을 알고 조금은 놀랐다. 당연하게도 자신의 사진을 찍을 사람은 건수를 노리는 기자 정도라고 생각했으니까. March.7에게서 레이시오의 사진도 몇개 공유받은 어벤츄린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오묘한 얼굴을 하던 그녀는 웃으며 여분의 카메라 필름을 나누어주었다. 이후에는 관람칸에서 차장은 무엇인지 고찰하고, 열차에서 나오는 스타피스 방송을 보거나 개척자에게 붙잡혀 두시간 정도 게임을 하기도 했다. 레이시오가 게임만 하지 말고 책을 읽으라는 잔소리를 했으나, 개척자가 있는 힘껏 자기 몫까지 반항하며 결국 분필을 맞는 엔딩이었다. 히메코의 권유로 티타임을 가졌을 때는 페나코니에서의 일을 돌아보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친절하고 생각이 깊은 인격자였다. 잠시 누나 생각이 났다. 커피를 권하는 히메코에게 레이시오가 커피를 마시지 못하니 차로 대신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어벤츄린은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러지? 레이시오의 표정이 정말 오묘했다.

더 블루의 상공을 절반 쯤 돌았을 때, 어벤츄린은 관람칸 의자에 앉아 멍하니 우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많은 호의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어디를 가든,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늘 자신의 첫인상은 최악이었고 기껏해야 조금 수상한 사람, 경계해서 나쁠 것 없는 사람 정도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열차팀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페나코니에서 컴퍼니를 위해 열차팀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개척자에게는 미안함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한 짓이 신용 포인트나 선물을 보내는 일이었지만, 그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함께 노는게 더 재밌기도 했다.

"그걸 깨닫는 것 만으로도 너는 성장한거야."

레이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성장, 나는 성장한걸까? 그렇다면 좋겠다는 짧은 감상 뿐이었다. 이제와서 이게 무슨 소용인데, 라는 생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무시하려고 하면 할 수록 수면 위로 떠오르는 부표 같았다. 여기까지가 너의 한계라는 듯이. 놓치고 지나친 인연은 분명 더 많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는 놓치지 말자.

"..."

어벤츄린은 그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광활한 우주는, 그 끝을 모르는 듯 어둡지만 반짝였다.

우주정거장으로 돌아온 열차는 얼마 뒤 다시 출발할 예정이었다.
두 사람은 점검을 마친 우주선에서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비교적 안전하고 최근 유명해진 해양 행성이었다.

"바다! 좋죠! 어벤츄린씨, 수영 잘하세요?"

"으음,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닌데. 생존 수영 정도만 배웠거든."

"그럼 바다에서도 문제 없겠네요~ 멀리 나가면 교수님이 잡아올 것 같고.."

"친구, 확신하고 있네? 레이시오는 날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 할것 같아?"

"네. 당연한거 아니에요?"

"당연하구나..."

개척자는 노란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즐거워보이시네요. 다음에 또 열차에 놀러오세요."

"..."

개척자가 열차에 오르며 건넨 말에, 어벤츄린은 그저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다음, 그런게 있을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벤츄린은 그저 웃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개척자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어깨를 으쓱이며 열차에 올랐다. 어벤츄린이 대답을 회피 하는 것은 한두번이 아니었으니까.

우주선에 올라, 소파에 몸을 누인 어벤츄린은 멍하니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친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자리잡지는 못했을테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호의를 표했다. 차장님의 털은 꽤나 기분 좋았지. 혼날 것 같아서 더 쓰다듬지는 못했지만... 결국 히메코의 커피는 마셔보지 못했고, 웰트에게서 아라하토 라는 애니메이션을 추천 받았다. 그가 만들었다는 것 같았다. 그런 취미도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단항은 말을 거의 붙여오지 않았지만 개척자나 March.7에게 둘러싸여 인형놀이를 당할 뻔 했을 때는 도와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열차는 어땠지?"

"...생각이상이었어."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지."

레이시오는 이 여행에서, 어벤츄린에게 단 한번도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발 뒤에서 어벤츄린이 여행을 온전히 즐기도록 도울 뿐이었다. 눈밭을 구르고, 별땟목에서 졸기도 하고, 열차에 몸을 싣고 우주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어벤츄린이 온전히 느끼도록. 호감을 표하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적나라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어벤츄린에게 향하는 것 중에 레이시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벤츄린은 가만히, 자동 운행 모드를 켜고 있는 레이시오의 등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에게도 이별을 각오할 시간이 필요할테다. 이 여행에서 너는 무엇을 얻을까, 얻는게 있기는 할까?

어벤츄린은 눈을 감았다. 아직은, 나는, 나를 사랑하는 너를 잘 모르겠다.

알아버리는게 무서웠다.

레이시오가 찾은 해양 행성은, 컴퍼니가 시장을 형성한지 얼마 되지 않은 변방이었다. 우주정거장에서 거리가 제법 되는 은하계에 위치했고, 워프를 하기에도 우주선의 동력문제가 걸려 도착하는데 꼬박 10일이 넘게 걸렸다.

행성은 문명의 발전 수준도 그리 높지 않고, 토속문화가 여전히 뿌리깊은 행성은 바다가 대부분인 곳 답게 해안가의 환경이 특히 아름다웠다. 하얀 벽에 푸른 지붕. 그 너머로 보이는 산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늘은 푸른 빛과 분홍빛이 적절히 섞여 장관이었다. 위성 두개가 낮이든 밤이든 하늘을 장식하고 항성의 빛은 적당히 따듯했다. 바다 수영을 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만들어진지 얼마 안된 우주간 교류 선착장에 우주선의 점검을 맡긴 후, 두 사람은 컴퍼니가 아닌 행성 자체에서 운영하던 호텔에 체크인했다. 행성 자체의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어벤츄린의 요구였다.

"..."

"호텔방에서 바다가 보이는군."

어벤츄린은 짐을 풀 생각도 하지 않고, 호텔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보고있었다.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는 바다 라는건, 저걸 말하는거였구나. 기껏해봐야 거대한 물 웅덩이 라고 생각했었다. 츠가냐에는 거대한 오아시스조차 드물었으니까.

"...나가자, 레이시오."

"그래. 선크림 발라."

"아 맞다."

레이시오가 건넨 튜브형 선크림을 받아 들고 얼굴을 비롯한 몸 여기저기에 바른 후에야 레이시오는 문앞에서 나와, 문을 열었다. 챙이 큰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하니, 영락없는 관광객이었다. 아, 꽃무늬 셔츠도 입었으면 좋았을텐데. 레이시오는 절대 안 입어주겠지. 어쩔 수 없이 어벤츄린은 어깨까지 파여있는 반팔에, 얇은 후드집업, 반바지를 입고 바다에 들어가기 위한 슬리퍼를 신었다. 레이시오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결국 평소처럼 흰 셔츠에 긴 바지를 입었다. 모래 때문인지 신발은 슬리퍼였지만.

"와! 오늘 축제라는데!"

해변가에 도착하니, 해안선을 따라 난 길에 많은 가게가 열려있었다. 입구 팻말을 보니 오늘 밤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먹거리나 장신구 같은 것을 파는 가게들은 해안선 끝까지 줄을 지어있었다. 인파가 많이 몰린 탓에, 두 사람은 몇 번 사람에 밀려 떨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했다. 어벤츄린의 보폭보다 레이시오의 보폭이 넓은 탓에 원래도 레이시오가 조금 느리게 걸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멈췄다 걷기를 반복해야할 수준이었다.

결국,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이 방법 뿐이야?"

"끈을 묶는 것 보다는 낫지 않나?"

"맞지... 맞는 말이지.."

자신의 손을 잡은 큰 손은 뜨거웠다. 레이시오는 몸에 열이 많은 편이었지.. 햇빛은 정오가 가까워질 수록 점점 뜨거워졌고 바다 근처라 습하기까지 했다. 그늘에 들어가면 조금 나아질테지만, 매대는 몇개를 제외하면 대부분 햇볓이 드는 곳에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어벤츄린은 찜기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것이다.

"...어, 레이시오! 저기 아이스크림 판다!"

"먹고싶나?"

"나 초코맛~"

아이스크림 가게는, 줄이 조금 길었다. 다들 같은 생각인거겠지.. 레이시오가 줄에 서 있는 동안 어벤츄린은 그 옆 가게를 구경하고 있었다. 작은 병에 소원을 담아 바다에 흘려보내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는 것 같았다. 쓰레기 문제는 어쩌냐는 질문에, 그래서 요즘은 잘 분해가 되는 신소재 유리로 만든다는 모양이었다. 레이시오가 아이스크림을 가져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어벤츄린은 병 속에 담을 소원을 적기로 했다. 어차피 정말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는 듯 턱을 괴고 있던 어벤츄린이 간결한 문장을 종이에 적었다.

[레이시오가 행복하기를]

"연인인가요? 정말 아름다운 문장이네요~"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좋아하는사람이에요."

"어머나! 낭만적인건 변함 없네요~ 꼭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래요."

"감사합니다.."

체험소 직원은 웃으며 어벤츄린에게 병과 코르크마개를 건네었다. 종이를 두루마리처럼 말아 고정한 뒤, 병에 담았다. 직접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은 스스로 해야한다는 직원의 말에 어벤츄린은 감사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뭘 하고 있었지?"

"구경. 여기 문화 체험소도 있대."

"흐음.. 일단, 여기."

"오, 아이스크림이다~ ...근데 왜 이렇게 크지."

어느새 한 손에 아이스크림 컵을 들고 온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에게 컵을 건네었다. 분명 손바닥만한 컵인데, 아이스크림은 고개를 조금 움직여야 그 끝이 보였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 장난하는거니.

"...2인분이야. 두명이라고 했더니.."

"...너.. 앞으로 뭐 살때 같이 사자.. 먹을거는.."

늘 이런 식이었다.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이 많이 먹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끼니를 거른 적은 한번도 없는데, 아직도 레이시오에게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스푼 두개로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절반은 초콜렛이었고, 절반은 바닐라였다. 모르는 척 먹어본 바닐라도 제법 맛있었다. 입안에서 차가운 냉기가 퍼지며 달짝찌근한 맛도 함께 퍼졌다. 단 것을 찾아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먹고 있자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바다내음은 그리 나쁘지 않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소음도 싫지 않았다. 다들 이래서 바다에 오는걸까?

아이스크림을 다 먹자, 어느새 해안선의 끝이었다. 사람이 적어 비교적 조용했고 파도와 새의 울음소리만이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한 구석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이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딸이 아버지를 묻고 있어."

"즐거워보이시는데."

"애가 저걸 판거야? 크게 될 것 같지...?"

"비범하군."

장난감 삽으로 땅을 판 여자아이는 아버지를 그 구덩이에 들어가 앉게 하더니 정성스레 모래로 묻어주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즐거운 듯 웃으며 함께 정성스레 묻어드리고 있었다. 화내는 소리보다는 웃음소리가 더 많이 들렸기에 두 사람은 유유히 못 본척 지나가기로 했다. 그래도 재미있어 보인다는 말을 했더니, 레이시오가 원한다면 너도 묻어줄까? 라는 말을 했기에 화를 내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어벤츄린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 가족에게서 시선을 때지 못했다. 단조로우나, 즐거워보였다.

바다에 들어가기에는 별 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슬리퍼를 손에 들고 파도에 발만 담구기로 했다. 어벤츄린은 가만히 바닥을 보며 파도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바다가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이내 떠나고, 다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저 멀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머리칼을 잔뜩 흐트려놓았으나, 눈이 아프지는 않았다.

찰칵

"이젠 심심하면 찍는 것 같은데?"

"예쁘길래."

"늘 그 소리야~"

"늘 그랬으니까."

카메라를 확인하던 레이시오가 다시 한번 렌즈를 눈에 맞추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던 어벤츄린은 잠시 시선을 돌리며 제 볼을 긁적이다가 이내 방긋 웃었다. 찬란한 햇살이, 그 미소를 비추는 것 같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레이시오가 어디선가 차를 빌려왔다. 위가 없는 오픈카였다. 드라이브를 가자며 차를 구해온다고 했을 때는 적당한 차를 가져오겠거니 싶었는데, 설마 이런걸 줄은 몰랐던 어벤츄린이 멍하니 눈앞의 차를 바라보았다. 하얀색으로 꽤 잘 빠진 오픈카였는데, 뒷자리에는 업체에서 같이 빌려준 수영용 튜브와 구명조끼 같은 것들이 실려있었다. 이 와중에 튜브는 오리모양도 있었다.

"에어컨보다는 바람이 더 좋지 않나?"

"네가 오픈카를 운전하는 상상이 안되어서..."

어색하게 웃었지만, 꽤 마음에 들었던 어벤츄린은 가볍게 문을 뛰어 넘어 조수석에 올라탔다. 해안가와는 달리, 도시가 위치한 곳은 제법 번화하고 있었다. 오픈카를 타고 가는 남자 두명은 꽤 눈에 띄었는지,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었다. 어벤츄린은 방긋 웃으며 마주 인사를 건네었고, 레이시오는 문에 턱을 괴고 미소지을 뿐이었다.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숲길을 달렸다. 바람을 따라 불어오는 향은 자연에 가까웠다. 문득, 기분이 좋아진 어벤츄린이 벨트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놀란 레이시오가 손을 뻗자, 어벤츄린은 그 손을 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앞유리를 잡고 웃었다. 한쪽 다리로 의자에 기대어 몸을 지탱하고 선글라스를 썼다.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시원하다~!"

"위험하니까 앉아!"

"에이, 이정도로는 생채기도 안나! 저기 봐, 레이시오! 다시 바다가 보이고 있잖아!"

"알았으니까! 어서!"

자신의 손을 잡은 레이시오를 바라보고, 어벤츄린은 웃음지었다. 선글라스 너머 눈은 여전히 신비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레이시오는 그 빛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앞을 보았다. 귀 끝이 조금 붉어진 것을 어벤츄린은 보았으나 놀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노을이 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저녁이 조금 넘어 불꽃놀이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해안가는 인산인해였다. 차를 세울 곳도 마땅히 없었던지라 두 사람은 조금 멀리 돌아왔다. 그나마 불꽃 놀이 장소에서 거리가 있는 바닷가는 사람이 적었지만, 그만큼 장애물이 많아 오고가는 것이 힘들었다. 어벤츄린은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구고 있었다. 레이시오는 모래사장에서 가족을 찾는 어린아이를 발견해 해안 순찰대에게 인계하러 갔기에 지금 그는 오랜만에 혼자였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 레이시오가 옆에 없던 시간은 하루가 안 될 것이다. 늘 두 사람은 함께 있었으나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늘 여행지에서의 감상을 이야기하고 레이시오가 돌직구로 꼬시려들면 어벤츄린이 피하는 정도였다. 어벤츄린은 지난 70일 동안 수많은 사람과 만났다. 어벤츄린에게는 이제 한달이 조금 남아있었다.

나는 정말 죽을까?
원초적인 질문을 다시 꺼내었다. 한번, 그는 죽을 뻔 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건졌다. 그 대신 레이시오가 다쳤고, 어벤츄린은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늘 자신을 죽음에서 구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이걸 행운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어벤츄린은 살아오는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축복을 축복으로서 받아들이자, 이제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벤츄린은 주사위를 굴렸다. 작은 쉴드를 바닥 삼아 굴러가던 주사위는 느리게 멈추었다.

하트가 나왔다. 어벤츄린의 패배였다.

노을이 서서히 기울고, 바다는 점점 어두워졌다.
너는 이 여행이 즐거웠을까. 물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어벤츄린은 기억했다. 나 때문에 선택한 길인데, 정작 내가 그걸 물어보지 않았구나. 나 때문에 너는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감정까지 낭비하고 있는데. 역시 조금 더 배려하는게 좋았어. 또 실수를 하는구나, 나는. 너는 시간낭비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데, 내가 지각하면 늘 지적을 했었고 시간 낭비하는 일 자체를 피하려고 했었지. 그런데 네가 이런 길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네가, 뭐라고 했었더라..

"어벤츄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등을 돌렸다. 레이시오가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멀리 있지?

"어"

발 밑이 순간 사라졌다. 아, 해안에는 갑자기 수심이 깊어지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인가? 순식간에 몸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언제 이렇게 깊은 곳 까지 들어온거지? 전혀 눈치 못챘는데. 세상이 조용해졌다. 바닷물은 생각 보다 차가웠고, 수면은 고요하게 일렁였다. 일어나야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 이대로 가라앉으면...

감기는 시야로, 큰 손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푸하..! 컥, 콜록..으윽.."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어벤츄린이 기침을 하며 물을 토해냈다. 나, 방금 가라앉으려고 한건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여서, 어벤츄린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수심이 얕은 곳에 주저 앉아 있었다. 물에 흠뻑 젖어 머리카락이 거슬렸다.

"...너.."

레이시오도 물에 젖은 채, 어벤츄린의 앞에 앉아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 놀랐겠구나. 갑자기 사람이 물에 빠지면 그럴 만 하지.. 어쩌지, 혼나는거 아냐? 어벤츄린이 무어라 사과의 말을 꺼내려 입을 달싹이자, 레이시오가 손을 뻗어 어벤츄린의 몸을 자신에게 붙여 끌어안았다.

"레,이시오?"

"...아직,..아직은..."

"어..?"

"...아직은.. 가지마.."

아, 그렇구나.

너는 내가 갑자기 떠나갈까봐 무서웠구나. 화도 못 낼만큼, 놀라고 무서웠구나.
어벤츄린은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을 살며시 감고, 잘게 떨리는 어깨를 끌어안았다. 레이시오는 자신을 끌어안는 감촉을 느끼고는, 어벤츄린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불안한 듯이 자신을 빈틈없이 끌어안으려는 힘을 온전히 느끼며, 어벤츄린은 눈을 깜빡였다. 사랑이라는게 도대체 뭐길래, 너와 나는 이런 고민을 하고 이런 상처를 입히고... 이런 불안감을 느끼는걸까.

너는 왜, 나를 사랑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벤츄린은 레이시오의 등 너머로 보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순간의 빛을 내었다가, 서서히 사라져가는 불꽃을 눈에 담았다. 불꽃이 모든 빛을 털어낼 때 까지, 두 사람은 그곳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계속, 그렇게.

호텔에 돌아온 뒤, 레이시오는 달라지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이.
바다에 들어갈 때는 튜브를 착용하라는 말만 할 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벤츄린은 그것에 만족했다.

두 사람은 바닷가에서만 10일을 보내었고, 이후 숲에서 5일을 보냈다.
산장에서 보내는 일상은 어벤츄린에게는 제법 안락했다. 안락의자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만 1시간을 할 정도로, 자연의 소리는 그에게 좋은 심신 안정제였다. 그것을 노린 것인지, 레이시오는 틈만나면 어벤츄린을 밖으로 불렀다. 장작을 패는 동안 물을 길어오라는 말을 하면서도, 벌레 퇴치 스프레이를 꼼꼼하게 뿌려준 후에야 양동이를 주는가하면 아예 의자를 밖으로 빼고 그곳에 앉아있도록 했다. 덕분에 어벤츄린은 대놓고 장작을 패는 레이시오를 특등석에서 감상 할 수 있었다.

도시에 나갔을 때는, 어느 순간 없어진 어벤츄린을 찾았더니 카지노에 있었기에 잡아와 하루종일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지역 특산물을 전문으로 요리하는 레스토랑에서 먹은 해산물 요리는 맛있었고,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레이시오를 깨워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이때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되짚는 것이 전부였다.

어벤츄린은 문득, 자신의 생에 이런 기억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어벤츄린]이 된 이후에도 그랬다. 내 생애에 있어서, 비문에 새겨넣을 가치가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내 묘비는 어디에 세워질까. 그런생각을 하다보니, 끝에는 한 곳 밖에 남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던, 15일 째 밤. 어벤츄린은 달빛을 등불 삼아 방을 나섰다. 바로 옆 방에서 레이시오가 자고 있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어벤츄린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침대 옆에 섰다. 레이시오는 여전히 단잠을 자고 있었다. 자는 얼굴도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어벤츄린은 잠이 오지 않으면 옆 방에서 자고 있는 레이시오를 보고 오곤 했다.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내 감정은 스스로 정리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의 여정을 되돌아보면 그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너는?

너는 아직도 나를 사랑할까. 이별할 준비를 잘 하고 있는걸까.

어벤츄린이 살며시 허리를 숙였다. 콧잔등을 스치는 호흡이 간질거렸다. 제 머리칼에 닿아 간질거리는지, 레이시오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닿았다 떨어진 온기는, 잠든 왕자를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어벤츄린."

"레이시오."

츠가냐로 가자.

속삭임은 짧았다. 레이시오가 손을 내밀자, 어벤츄린은 별다른 고민 없이 그 손을 잡아 내려 그의 배 위에 올려주었다.

"내일 떠날 준비 할게. 더 자."

"...그래."

레이시오는 제 손으로 눈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밤은 깊었고, 잠 못 이루는 사람만 늘어났으나 달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앞으로,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14일 뿐이었다.

츠가냐로 향하는 내내, 어벤츄린은 말이 없었다. 서서히 말을 붙여오지 않게 되었고, 의도적으로 레이시오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레이시오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이 여행에서만큼은,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에게 먼저 감정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세 개의 은하가 맞닿은 곳에 위치한 츠나갸는 이동하는 것 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워프를 계속하며 중간중간 소행성지대도 지나야 했기에 츠가냐에 도착한 것은 출발 이틀 뒤였다.

츠가냐의 땅은 여전히 척박했다. 컴퍼니가 자리를 잡은 주요 구역 외에는 여전히 사막이 펼쳐져있었고, 에브긴이 마지막으로 거쳤던 사막은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지 오래였다. 두 사람이 머물 곳은 어벤츄린이 소유한 유일한 별장이었다. 어벤츄린이 과거 잠깐의 변덕으로 구매한 별장은 사막과 주거구역의 중간지점에 위치해있었다. 사람이 거의 오지 않고, 어벤츄린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컴퍼니 소속 직원이 관리하던 곳이었다. 2주 뒤에는 이 별장도 경매에 오를 예정이었다. 죽든, 살든. 어벤츄린이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었다.

"자료로 본 것 보다 척박하군. 근 몇달 동안 비가 오지 않은건가?"

"원래 사막은 이랬어. 그나마 주요 도시는 지하수나 컴퍼니의 협조로 조금은 나은 편이야. 뭐, 어차피 난 밖으로 안 나갈거지만."

"둘러보지 않을건가?"

"츠가냐에서 에브긴 사람이 돌아다니면 둘 중 하나야. 쫓겨나거나, 두들겨 맞고 죽을 뻔 하거나. 뻔하지."

대학살 이전에도 에브긴 사람은 시기와 질투, 핍박의 대상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건 없다. 심지어 마지막 에브긴인 자신은 더더욱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돌 맞고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텐데. 식료품이나 필요한 것도 모두 별장을 관리하던 직원이 구해주기로 했으니 레이시오가 에브긴에 대한 나쁜 말을 듣고 오는 일도 없겠지. 궁금해하면 어쩔 수 없이 보내주긴 해야겠지만.. 하지만 어벤츄린의 걱정과는 달리, 레이시오는 별장 부지 외에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별장 정원에서 척박한 땅에서도 자라는 식물을 살필 뿐이었다.

어벤츄린은 창 밖으로 보이는 드넓은 사막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언제부터였지? 과거를 떠올려도, 마치 타인의 인생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이라면, 떠나보낼 수 있을 거야.

거실은 커녕, 침실에서도 거의 나오지 않던 어벤츄린은 츠가냐에 도착한지 이틀 째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밥은 잘 챙겨먹었기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레이시오는, 현관문을 나선 어벤츄린에게 다가가 양산을 씌워 줄 뿐이었다.

"저기, 언덕 보이지. 저기가 이 근처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야. 하늘과 가장 가까운 언덕이라고 불렀었어. 그 위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다 말라 죽었는데도 계속 그 자리에 있지."

멍한 얼굴로 정원 벤치에 걸터앉은 어벤츄린이,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 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브긴은 소문 처럼 마냥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더니 어린 시절 누나의 목걸이를 되찾으려 카티카인과 목숨을 걸고 내기를 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이시오가 몇번이나 침음을 흘리고 눈을 감았으나, 어벤츄린은 개의치 않았다.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에 가까웠다. 생일날 에브긴이 전멸했으며, 이후 행성을 전전하고 노예로 팔렸고 그 주인까지 죽인 후 어벤츄린으로서 그저 살기 위해 살아왔다는 이야기까지 했을 때.

어느새 레이시오가 한 손에는 자신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 기분 나빴나?

"역시 별로지? 나."

"...아니.."

"늘 진흙 속을 구르며 목숨만 부지하며 살았거든. 사랑할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지?"

"그게 아니야."

"이런 나도 사랑하겠다고 말할거야?"

끊임없이 시험하고 시험했다. 네가 사랑하는 [어벤츄린]은 이런 사람이라고. 하루하루 살다가 지쳐 죽음을 생각했고, 결국 살기를 택했으나 여전히 산산조각난 광물이라고. 그런데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내심 포기해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이야기했다.

"너는, 지금 자신의 인생을 타인의 것 처럼 말하고 있어."

"...아..그랬나? 뭐, 지난 일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스스로를 사랑했으면 했어."

"못 한다는거 알잖아."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해체하기를 바라지 않았어."

레이시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함께 여행을 하며, 어벤츄린은 조금씩이나마 새로운 것을 배웠다. 가본 적 없는 곳에 가서 즐기는 법을 배웠고 도박이 아닌 다른 재미를 찾는 법을 배웠다. 타인의 호의를 온전히 받는 법을 배웠고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레이시오는 그것이 기꺼웠다.

그럼에도, 어벤츄린은 자신을 상냥하게 풀어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사람은 자신을 아는 법을 배워야해."

"그 사람에 나도 포함되나?"

"답을 정해놓고 질문 하지 마."

"미안. 하지만 난 역시, 네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레이시오."

레이시오는 아무 말 없이 어벤츄린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밀어낼 생각이 없는건지, 그럴 힘도 없는 건지. 어벤츄린은 조용히 안겨서는 어깨에 기대었다. 츠가냐에 도착해서 어벤츄린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향에 도착해서 그가 즐거워 할것이라 생각했지만,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이 츠가냐에 가까워 지면 질 수록 웃지 않게 된 것을 기억했다. 그는 늘 츠가냐를 그리워 했지만, 동시에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다.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다보면, 자연스레 핏물이 떨어지는 기억마저 떠올랐으니까.
츠가냐에 도착한 첫날, 어벤츄린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겨우 잠들었을 때에도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설친 탓에 하루 대부분을 쪽잠으로 보냈다. 레이시오는 그의 끼니만을 챙길 뿐 스스로 이겨내리라 생각했으나, 크나큰 오답이었다. 어벤츄린은 이제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남지 않았다. 매일 악몽을 꾸고, 서서히 무기력해졌으며 정신력이 바닥나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은, 서서히 고통없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10일 밖에 남지 않았다.
서서히 해가 기울어,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유독 한 사람의 그림자가 짙었다.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을 품에 끌어안은 채 입을 달싹였다. 지척에서 들리는 숨소리에 어벤츄린이 어깨를 잘게 떨었다.

"너는 도박을 좋아하면서도 지는걸 두려워하지. 행운을 누구보다 믿으면서도 누구보다 의심했어."

"..그랬던가?"

"남들은 네가 허영심 많고 치장한 공작새라고 생각하지.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어. 하지만, 온전한 너는 화려한 옷 보다는 가벼운 옷을 선호했지."

"..장신구는 포기 못했는데."

"내가 알려준 대로 스스로 일어나 돌아온 순간에는 너무 기뻤어."

"...."

"그리고... ..나에게 그렇게 끈덕지게 붙어온 건 네가 처음이었거든."

"...너, 성격 안좋은거 알지?"

"알아. 그래서 그래."

너를 사랑하는 이유. 그런건, 너무 단순해서. 도리어 설명하기가 어려웠으니까.

"나는, 네가 하는 이야기와 네가 짓는 표정. 네가 가진 의지와 너로 구성된 그 모든 것을 사랑해. 네가 바라는 모습을 찾는다면, 나는 그마저도 사랑할거야."

네가 무엇이더라도. 나는 결국 너를 사랑할테니까.

어벤츄린은 말 없이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해가 기울고, 별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어벤츄린은 고개를 들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 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거절을 바랬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다시 고민하기를 바랬다.

"...그러니, 스스로를 상처입히지마. 나는, 너로인해 상처받지 않아."

"..어째서 그렇게 단언할 수 있어? 너도 결국은, 인간이야."

"그렇지. 화를 낼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때론 슬퍼질 지도 모르지. 지금까지도 몇번 그랬었잖아. 하지만, 그로 인해 너에게 실망하지는 않을거라고 확신하지. 그에 대한 고찰은, 오래 전에 끝났어. ..너도, 그렇지 않나?"

이길 수가 없다. 당연한 인과결과였다.
그날, 레이시오가 도망친 자신을 찾아 온 날. 눈물을 흘리며 내뱉은 고백을 들었던 그 날.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내뱉지 못한, 어벤츄린의 패배였다.

그 한마디를 못해서. 거절 한번을 하지 못해서. 두 사람은 지금까지 함께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생이 이어지든 이어지지 못하든.

"레이시오."

그렇다면 인정하는 수 밖에.

"언덕에 올라가자."

인정할게. 나에게 찾아온 가장 큰 행운이 너라는걸.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 너라는걸.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말라비틀어진 고목이 자리한 언덕은 빈 말로라도 좋은 곳은 아니었다. 풀이 자라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말라있었고, 가장 높은 곳에는 다소 흉측한 나무가 있었으니까.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겼다는 말은 정말 인 듯 보였다. 어벤츄린은 언덕에 올라서는 사막 저 편을 가리켰다.

"사막에서 바라보면, 하늘은 늘 너무 높았는데. 언덕에 오르면 조금은 다를까 싶었었거든? 그런데 산을 올라도 하늘은 여전히 높더라."

어벤츄린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쏟아질 것 처럼 눈앞에 있었다. 그에게, 하늘은 더이상 미지의 존재가 아니었고 더 넓은 우주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저 별들이 너무 멀리 있었다.

"...레이시오."

"...응."

"..너, 나한테는 한번도 안 물어봤잖아."

내가 너를 사랑하느냐고.

아마 나를 배려한 것이겠지. 내가 내 감정을 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너의 사랑을 시험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너를 거절 할 수 없어서 이 여행을 시작했다는 것을 네가 모를리가 없었지. 고백을 거절한게 아니라, 대답 자체를 회피해버렸는데.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에게 삶의 의지와 자신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었고, 어벤츄린은 레이시오에게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었다.

그저 그것뿐이다.

"...어벤츄린."

"이름, 불러줘."

한번만, 카카바샤라고 불러줘.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와, 조금 놀란 어벤츄린이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아, 이렇게 말하려던게 아니었는데. 짓무른 눈가를 부비며 고개를 들자, 어느새 옆에 서있던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의 앞에 서있었다. 잠시 침묵하며,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카카바샤."

"...응.. ....응..레이시오."

"사랑한다고, 말하게 해줘."

"..얼마든지."

너는 언제나, 나를 살게 만든다. 나의 행운이, 나의 생을 이어주는 것이라면. 너는 분명 내 생의 마지막까지, 행운으로서 곁에 함께하겠지. 너에게, 나라는 상처를 남기면 안되는데. 나에게, 너라는 미련을 남기면 안되는데.

결국 나를 바보로 만드는 것도 너였지.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 ..미안해.. 미안.."

"..사과하지마.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끌어안는 힘이 강해지더니, 이내 조금 떨어졌다. 얼굴이 겹쳐지고, 어벤츄린은 눈을 감았다. 입술이 맞물리다 짧게 떨어지고, 다시 맞물렸다. 입 안을 헤집어놓는 감각이 낯설었다. 숨 쉬는게 힘들어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야,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을 놓아주었다. 눈에 고인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준 레이시오가 다시 제 품안에 소중한 보물을 가두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짐승새끼."

"....미안하다.."

"너 정말 대단하다.. 그동안은 어떻게 참았어? 90일을 넘게?"

"..그때는, 네가 더 나아지는 걸 더 생각했고..이런걸 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원래 이런건 상호 동의가.."

"응, 그래. 난 네가 이렇게 고삐 풀린 짐승처럼 흘레붙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는데."

"...내가 잘못했어.."

어벤츄린은 힘없이 침대와 한 몸이 된 채, 침대 옆 바닥에 상의도 입지 않고 무릎을 꿇고 있는 레이시오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몸 여기저기 잇자국과 손자국이 없는 곳이 없었다. 손톱자국 가득한 레이시오가 다소 안쓰럽기는 했으나, 당장은 자신이 문제였다. 어떻게 하룻 밤만에 사람을 움직일 수도 없게 만들 수 있지? 머리가 좋으면 이런것도 잘하는건가? 아니면 그냥 얘가 문제인건가? 어벤츄린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좋아한다고 90일 내내 티를 내고 있기는 했는데 이정도 일 줄은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간밤에 있었던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초반은 그래도 기억이 또렸했지만, 도중에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더니 1시간 쯤 지난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일어나보니 허리를 비롯한 모든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있고 목소리도 갈라져있어서.. 대충 예상만 할 뿐이었다.

"됐어.. 물이나 줘.."

"알겠어.."

단단히 화가 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시무룩해진 레이시오가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뭐야, 귀엽게 왜저래? 꼭 혼이 난 강아지 같아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이 붉어진 어벤츄린이 이불을 코 끝까지 덮었다.

아, 진짜 아픈데 이거. 어쩌지?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곳까지 쓰라렸다. 언덕에서 고백한 후, 키스를 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다짜고짜 안아들어서는 엄청난 속도로 별장에 돌아올 때 이상함을 감지했어야 했다. 한 손에는 자신을 들고 있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문을 부술 기세로 열어 젖혔다. 그래서 방에 도착했을 때는 무슨 일을 당할지 상상도 안되어 무섭기만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달려와놓고 정작 침대에 내려 놓을 때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시선이 맞물렸고, 그 뒤에는.. 뭐. 침대 시트에 약간의 핏자국이 있는 걸 보니, 정말 짐승새끼 처럼 물어 댔구나 싶었다. 초반에는 잠깐, 이라는 말을 했더니 알았다며 멈춰서는 얼마나 기다려야하냐는 말을 했던 레이시오가 한번 끝내고 나니 이성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세번째부터는 기억이 전혀 없어서, 어벤츄린은 다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미운건 아니고... 죄책감은 있는지 지난 밤 뿌리 끝까지 짜여진 것 치고는 이불이나 자신의 몸을 비롯한 다른 것은 깔끔했다. 핏자국은 밤중에 잇자국에서 살짝 나온 것 같았다.

이럴거였으면 애초에 자제를 하던가...

"...어라."

자세를 고치려 안간힘을 쓰며 부스럭 거리던 어벤츄린이 침대 옆 협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놓아둔 것인지 모를 꽃병에, 활짝 핀 둥근 모란이 있었다.
벨로보그에서 샀던 꽃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었던 것도 신기한데, 그것이 기어코 두달을 버텨 꽃을 피워냈다.
정말 아름다운 꽃이었다. 베리타스 레이시오가 꽃말을 알아보며 꽃을 샀을까? 어느쪽이든, 어벤츄린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보니.. 그때 개척자가..

"..물, 마실 수 있겠어?"

"으응.. 일으켜줘~ 허리아파서 못 움직이겠어."

"..그래.."

물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아침식사까지 함께 가져온 레이시오는, 여전히 다소 시무룩해보였다. 너무 놀렸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은 어벤츄린이 팔을 휘적거리니 쟁반을 테이블에 놓은 레이시오가 살며시 어벤츄린의 손을 잡고 등을 받쳐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어벤츄린이 베개를 쿠션 삼아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자 느릿하게 잡고 있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여전히 시선을 어벤츄린을 보고 있었다.

"뭐야, 용서해달라고 애교부려?"

"그런..의도는 아니었지만. 용서해준다면 한번 더 하지."

"화 안났어~ 놀려주려고 그랬던거야."

물 한모금을 마신 어벤츄린이 키득이며 웃었다. 레이시오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레이시오."

"응."

"사랑해."

꽃병에 꽂혀있던 둥근 모란 한 송이를 손에 들고, 어벤츄린이 속삭였다.

"반지는 결혼식장에서 받을래."

"....그래. 츠가냐를 떠나면 내 모행성으로 가서 인사 드려야겠어."

"내 마음의 준비는 어디로 갔어. 뭐 챙겨갈거 있나? 집문서 라던가."

"그런거 필요없어. 넌 너만 가면 되니까."

"나 마음에 들어하실까?"

"너 같은 사람이 없지."

"칭찬이야?"

"물론."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눈두덩이와 콧단등을 따라 입술에도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하지만 어벤츄린이 그의 목에 팔을 감았기에, 떨어져있는 시간은 짧았다. 어벤츄린의 볼을 감싼 손은 뜨거웠다. 레이시오는 생각보다 열이 많은 체질이었고, 어벤츄린은 비교적 살갖이 차가운 편이었다. 손이 닿은 곳이 불에 닿은 듯 뜨거웠으나, 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아, 잠깐만.. 레이시오."

"..왜 그래? 허리 아파?"

"그것도 있는데.. 저기, 내 가방 좀.."

레이시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벤츄린의 작은 가방을 가져왔다. 츠가냐에 남길 것은 없다는 듯이, 우주선에서 가지고 내린 것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가방은 꽤 가벼웠다. 가방을 열어 안을 뒤적이던 어벤츄린이 녹색 리본이 감긴 하얀색 상자 하나를 꺼내었다.

"...자. 이거.."

"..? 고맙군. 열어봐도 되나?"

"아, ...마음대로 해."

어벤츄린이 이불을 끌어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는 시선을 피했다. 레이시오가 천천히 상자를 열자, 안에는 곱게 놓인 한 쪽 귀걸이가 있었다. 세공된 터키석에 신비한 문양으로 매듭지어진 장식이 달려있었다.

"이건.."

"..에브긴 사람은 터키석 장신구를 좋아해. 지모신의 빛과 닮았거든. ..매듭은.. 내가 묶은거야."

"시뮬레이션 우주의 차원 장신구와 비슷하군."

"츠가냐도 있어? 본 적 없는데. ...너 귀도 안 뚫었는데. 역시 좀 그렇지?"

"뚫으면 되는 일이지."

레이시오가 귀걸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나 협탁에서 알코올 솜을 꺼냈다. 귀걸이의 침 부분을 닦고는... 작은 바늘도 소독을..?

"야, 야!! 너 뭐해!!!"

"귀 뚫을 준비."

"아니, 누가 당장 끼라고 준 줄 알아?!"

"해줄건가?"

"내가?!"

자기 오른쪽 귀 까지 소독을 끝마친 레이시오가 바늘을 어벤츄린에게 건넸다. 아, 피어싱건 버리지 말걸. 설마 레이시오가 이럴 줄은 몰랐단 말이야.

결국 바늘을 손에 들게 된 어벤츄린이 살며시 레이시오의 귀를 만졌다. 아, 상처 하나 없는 귀에 구멍을 뚫어야한다니. 역시 귀걸이보다는 목걸이나 팔찌가 나았어. 되도않는 후회를 하는 어벤츄린을 지긋이 바라보던 레이시오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원할때 해. 기다릴테니까."

"으으..알았어... ...한다..? 진짜 해..?!"

"응."

어벤츄린은 눈을 감고 있는 레이시오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와, 속눈썹 길어. 눈 감고 있어도 잘생겼네...

"허억.."

멍하니 얼굴을 보고 있으니, 손이 어느새 귓볼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그래도 잘 뚫었는지 피가 나지는 않았다. 귀걸이를 걸어주니, 레이시오가 눈을 떴다.

"..아파?"

"아무래도. ..어때, 어울리나?"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잘 받네.."

"그거 다행이군."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의 왼손을 감싸쥐고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손바닥에 볼을 부비적거리고는, 시선을 보냈다. 아, 꼭 잡아먹을 것 처럼 보는구나. 귀여워. 두 사람이 다시 입을 맞추었다. 햇살은 여전히, 그들을 따스하게 비추었으며 닿아오는 온기는 뜨거울 만큼 가까웠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았을텐데.

레이시오는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 하고는 아직 자고 있는 그의 옆에 몸을 누이고 조용히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으나, 어벤츄린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벤츄린의 몸은 더 이상 원하는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어제부터 하반신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행운은 더 이상 그를 지켜주지 않았다. 주사위를 굴려도 스페이드가 무조건 나오지 않았고, 칩을 가지고 놀 힘도 없었다.

0일째 아침이었다.

부쩍 잠이 늘어난 어벤츄린은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다가 정오가 좀 넘어서야 레이시오를 침대에서 놓아주었다. 레이시오가 없으면 잠도 자지 않으려 버텼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눈을 뜨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입맛도 거의 없어졌기에 간단한 토스트가 전부였다. 남은 시간에는 침대 맡에서 책을 읽는 레이시오의 품을 파고들어서는 책을 힐끗 보다 레이시오의 얼굴을 힐끗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입을 맞추고, 손을 잡고 뒹굴다가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하는게 전부였다.

아무런 특징도, 이변도 없는. 그런 평범한 하루였다.
오늘 죽을 사람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을 만큼, 그는 평온했다.

그리고 노을이 질 시간이 되었다.
어벤츄린은 펜을 들고, 종이에 무언가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종이를 넣을 봉투에는 [유언장]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미루고, 미루었던 작업은 결국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오늘이 지나서, 자신의 손으로 찢어 불태우는 결말이더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컴퍼니를 나오면서 대부분 처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남아있는 것이 많았다.

남은 금융재산은 모두 레이시오 앞으로 돌리고, 본인 동의하에 우주 난민의 처우 개선을 위한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적어두었다. 어벤츄린 소유의 물건 대부분은 레이시오 앞으로 해두었지만 미처 처분하지 않았던 주식이나 권리는 친분을 쌓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써내려갔다. 야릴로의 하층구역 열계 대비를 위한 후원이라던가, 해양행성의 환경 및 원주민 보호 조약같은 것, 개척자가 과연 우주 방망이 협객의 콘솔게임 베타버전 체험권을 좋아할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이런 곳에 돈을 쓰는 것도 꽤 색다른 경험이었다. 끝에는 지명된 사람들이 받지 않을 경우, 그들의 이름으로 후원이며 조약같은 것을 이행할 단체를 설립하는 것으로 해두었다. 어떻게든 받게 만들 생각이었다.

자신의 시신에 대한 권리는 역시 레이시오에게 일임했다. 화장을 하던 매장을 하던, 상관은 없었으나. 추후 레이시오도 자신의 옆자리에 있어야한다는 항목을 적었다. 장소는 상관 없었다. 과거에는 츠가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의 옆자리라면 어디든 상관 없었다. 허락하든 하지 않든 유언이니 지켜줘야지, 뭐.

그는 유언장에 마침표를 찍고, 싸인에 도장과 지장까지 찍었다. 믿을 수 있는 컴퍼니 소속 변호사와 공증에 관한 이야기도 마무리되었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울 것 같은 기분도 아니었고, 다소 공허한 감각이었다.
실감도 나지 않았고, 그냥.. 내일 이걸 내 손으로 찢어버리고 싶었다.

펜을 내려놓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어벤츄린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레이시오를 바라보았다.

그저 웃으며, 레이시오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모신께서 날 부르셔."

어벤츄린의 말에 레이시오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그를 안아 들었다.
여전히 그들에게 죽음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추악하지도 않았다. 그 어떤 수식어도 형용할 수 없는 무형의 존재였다. 이미 두 사람은 함께하며 이 날을 준비하였기에, 더 이상 서로에게 보여줄 눈물은 없었다.

레이시오는 별장 근처에 위치한 츠가냐의 하늘이 잘 보이는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어벤츄린이 충동적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고, 결국 패배를 인정한 그 언덕이었다. 여전히 다 말라 비틀어진 고목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사막이 바로 근처에 있어 공기는 건조하고, 노을이 지는 시간임에도 땅은 남은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언덕 위, 하늘과 가장 가까운 장소에 도착한 레이시오가 조심스레 마른 풀밭에 앉았다. 레이시오의 오른쪽 귀에 자리한 귀걸이를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며 웃던 어벤츄린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말했다.

"곧 비가 올거야."

"그래."

"이러다 나 안 죽으면, 그땐 뭘 할거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일 했던 것 같은데. 내 모행성으로 가서 인사드리고, 결혼식장을 알아볼거야."

"...그거 좋은 생각인걸.. 아주 매력적이야."

레이시오의 무릎에 앉혀진 어벤츄린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애써 뜨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먹구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곧, 비가 올것이다. 이곳에 비를 피할 곳은 없었다.

아 여기 이대로 있다간 레이시오가 비를 맞을텐데, 어벤츄린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이는 레이시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웃었다. 이 순간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그저, 눈앞의 얼굴을 더 보고싶었다. 그 뿐이었다.

서서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 이게 죽음이라는 건가? 잠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페나코니에서 드림 풀에 몸을 누인 채 꿈세계에 들어가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딱 이런 기분이었는데. 깊은 잠을 자는 이유에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 라는 대답을 내놓았던가. 역시 반 쯤은 맞는 말이었잖아?

가물가물해지는 시야를 바로 잡으면서도, 단 한 사람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레이시오."

"응."

"행복했어?"

"내 생애 더 없을 만큼."

"...나도 그래."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100일. 결코 짧지 않으나 결코 길지도 못할 시간 동안.
그들은 분명 사랑을 했다. 매 순간 선택을 의심하고 후회하다가 결국에는 함께 하기를 선택했고, 이제 그 끝에 다다르고 말았다. 어벤츄린은 레이시오의 손을 가져가 제 손과 깍지 껴 잡고는 배시시 웃었다. 큰 손은 여전히 자신의 손을 덮을 만큼 컸고, 그의 온기로 따스했다. 어벤츄린은 지금 이순간에도, 운명이 또 한번 불공평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가족들이 자랑스러워 할까, 정말 너는 내가 없어도 괜찮을까.

"...역시, 사랑 때문일 수 밖에."

내가 없어야 네가 행복할 것이라는 거짓말.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그렇게 만들려고 했던 것은. 결국 사랑하기 때문이었으니까. 지난 100일 동안 어벤츄린은 그것이 거짓임을 명확히 증명해냈다. 여전히, 남겨지는 사람에 대한 걱정은 있었지만.

"내 마지막을 보는 사람이 너라서 다행이야."

티 내지 말자. 울지마. 더 이상, 비가 내리는 날에 눈물은 흘리지 않기로 다짐했잖아.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벤츄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오로라의 풍경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저 멀리, 그리운 가족들이 손을 흔드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그의 얼굴에 떨어지는 물은 하늘이 내리는 눈물인지 레이시오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벤츄린은 아마 느끼지도 못할테니까. 졸렸다. 어린아이가 잠에 빠져들 듯, 어벤츄린의 의식은 포근한 깃털에 감싸이 듯 서서히 가라앉아갔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입가에 미소를 올리고 입을 열었다.

"레이시오."

"...응."

"반지, 끼워줘."

"...결혼식장에서 받겠다며."

"마음이, 바뀌었어. ..지금 끼워줘. 가지고 왔잖아. ...너, 늘 가지고 다니는거.. 다 알아."

어벤츄린이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던 레이시오가 조용히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단 한번도 열어본 적이 없는 상자를 열자, 은색의 반지가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레이시오가 자신의 왼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느릿하게 눈을 감은 어벤츄린이 입을 달싹였다.

"레이시오..."

"응."

"...사랑해."

살아가. 행운을 빌어.

속삭임은 짧았다. 반지를 끼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빗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아주 짧은 소나기였다. 하늘은 서서히 구름을 걷어내며 그 흔적을 지우며 땅에 다시금 빛을 내리기 시작했다.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운 레이시오가, 빗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 나서야 고개를 움직이고는, 어벤츄린을 바라보았다. 마치 잠에 빠진 것 같이, 평온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정말, 정말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너는,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볼 수 있었을까.

하늘과 맞닿은 언덕 위, 레이시오는 편안히 눈을 감은 어벤츄린을 끌어안고 움직이지 않았다.

"어벤츄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카카바샤."

카카바의 오로라는, 그녀가 사랑하는 마지막 아이를 맞이한 채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레이시오는, 그저 그 자리에서 어벤츄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부비며 작은 몸을 더욱 끌어당겨 안았다. 곧 사라질 온기를 조금이라도 잡아두고 싶었다. 지난 100일.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다. 하지만 레이시오는 몇번이고 다른 가능성을 찾아 헤맸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너는 살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도 이제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결국 어벤츄린을 사랑했고, 그는 지모신에게 사랑받았다. 가장 크고, 무거운 사랑을 받던 사람이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끊임없이 흘렀다. 시야가 흐려지면서도, 평온하게 잠든 얼굴 만큼은 선명했다. 손 끝에 남은 온기도, 그 미소도, 사랑을 말하는 입술도, 살아라는 속삭임도.

모두 사랑하는 이가 남긴 유산이었다.

"사랑해"

아마도, 분명, 영원히.

"레이시오 교수님. 다음 강의 말인데요.."

"내가 확인하지. 들어가봐."

"네, 알겠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가 젖혀지는 소리가 들리고, 얕은 한숨이 들렸다.
연구실의 주인은 아무 말 없이 목에 건 반지를 만지작 거렸다. 제 왼손에도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도, 보고싶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귀에 걸린 터키석 귀걸이가 작게 반짝였다.
책상 한켠에 놓인 작은 액자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정쩡하게 웃고, 놀라 당황하고 있는데다, 너무 울어서 눈가까지 붉어져있는..

그런 엉망진창인 사진이었다.

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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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츄린]여정의 끝: 레츄가 나를이렇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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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Laurine 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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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Laurine 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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